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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작가 Jan 09. 2023

소녀와 장미

나의 꽃을 피우리 - 장미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 중요한 날이다. 그녀를 보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투명하도록 창백한 피부를 가진 소녀는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 속에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하얀 얼굴은 빛을 받아 눈부셨다. 저러다 조각조각 흩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선명하게 붉은 장미와 투명하게 시린 소녀의 대비에 나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녀의 눈이 나를 사로잡았다.

소녀의 커다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슬픈 눈이었다.



나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과외를 소개받았다. 일주일에 두 번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다. 서울이 아니라 경기권 별장으로 가야 한다. 소위 갑부집 딸 개인 과외를 하게 된 것이다.

거리가 있는 만큼 과외비가 세서 돈이 필요한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마을버스를 탔다.  초록색 들판이 펼쳐졌다. 무심히 들판을 응시하다 들판과 맞닿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을 본지가 언제인가. 풀냄새, 나무냄새가 바람과 함께 코끝으로 들어온다.

산 넘고 물 건너 드디어 별장 앞에 도착했다. 높은 정문 너머로 세련된 저택이 보인다. 별장은 생각보다 크고 정원은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정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눈앞에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꽃밭은 구획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붉은색 장미가 눈에 띄었다.  꽃봉오리는 탐스러웠고 잎사귀마다 윤기가 흘렀다. 화려한 장미에 취해 넋 놓고 바라보다 그제야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장미 사이에 소녀가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소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나를 안내하러 나와 있었다고 했다. 소녀가 안내하는 대로 현관을 지나 S자로 휘어진 계단을 올라가니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소녀의 아뜰리에였다. 불필요한 가구가 없는 소박한 거실이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멋진 산새가 액자 풍경처럼 담겨있었다.  큰 수술을 하고 요양 중인 소녀는 체력이 허락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수북이 쌓인 스케치북에는 다양한 꽃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입시 미술을 하지 않은 소녀의 그림은 투박했지만 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었다.

당황했지만 애써 티를 안 내며 그녀와 첫 번째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소녀를 만나는 두 번째 날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을 떠올린다. 어쩐지 그녀는 이 세상에 사는 것 같지 않다. 사는 곳도 얼굴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눈을 떴다. 초록빛과 하늘빛만 가득한 곳에 도착했다. 소녀는 오늘도 정원에 나와 있었다.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를 보니 알겠다. 그녀도 나를 기다렸음을.





그림을 그리다 소녀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는요, 선생님....


일찍 일어나요.

아침에 상승하는 기운을 느끼는 게 좋거든요.

해뜨기 전 고요와 해가 뜨기 시작하는 찰나를 사랑해요.

어둠에 대비되는 밝은 공간도 좋고요.

그리고 가장 좋은 건... 고요한 새벽 시간이에요.


나는 소녀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누구나 자연과 교감을 하는 건 아니다. 너의 영혼이 맑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영혼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서로를 느낀다.


그렇다. 나는 소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사랑을 꿈꾸지 않는다. 사랑은 어차피 불완전하니까.

잠시 완벽하게 교감하는 순간. 그 순간이면 족하다.



자주색 장미 꽃말은 황홀함, 장엄함

보라색 장미 꽃말은 불완전한 사랑, 영원한 사랑

라벤더색 장미 꽃말은 첫눈에 빠진 사랑이다.


소녀의 아뜰리에 창문가에는 색색의 장미가 꽃병마다 탐스럽게 꽂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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