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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May 24. 2023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마음

기억 속 내 이야기





11살부터 8년간 부재였던 엄마와 열아홉에 다시 왕래를 시작했다. 내가 부산으로 가끔 엄마를 만나러 가면 정성스럽게 음식을 해서 밥상을 차려줬다. 결혼을 한 후 엄마는 자주 반찬을 해서 택배로 보내주고 김장까지 해서 무거운 김장김치를 몇 박스나 부쳐주었다.  아기를 낳을 때 부산에서 부천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산후조리를 해 주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1년에 한두 번씩 2주 정도 부산 엄마에게 가 있었다. 엄마가 아이들을 봐주는 동안 대여점에서 만화책과 비디오를 산더미처럼 빌려보고 엄마가 싸준 김밥과 음식을 먹으며 느긋하게 보냈다. 그런 엄마가 고마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서운함이 깨끗하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 원망의 찌꺼기를 나도 모르게 표를 내고는 했는데 그 방법이 참 유치했다. 엄마가 먼저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지 않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먼저 연락을 안 하는 것이다. 무심하게 지내다 문득 엄마에게 일주일 가까이 연락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먼저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엄마의 생신도 어버이날도 마음이 우러나왔다기보다 그냥 지나가면 서운해하니까 의무감에 챙길 때가 많았다.   


엄마만큼 아빠에게 느끼는 감정도 복잡했다. 1년에 겨우 한 번 보는 아빠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애달프면서도 때때로 못된 마음이 올라왔다.

'이건 아빠 탓이야! 친정이 마음에 고향은 아니더라도 갈 수 있는 곳 정도는 돼야 하잖아? 티끌만큼도 애정이 없는 곳, 냄새 고약한 곳, 과거 그대로 박제된 공간에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아무렇게나 했기에 내가 아빠를 만나러 못 가는 거예요. 자식이랑 외손주를 자주 못 보는 건 아빠가 짊어져야 할 대가예요.' 보고 있으면 불쌍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아빠에게 대거리를 했다. 

아빠의 우유부단함이 답답했다. 그런 아빠를 보고 자라서인지 나는 말을 분명하게 못 하고 입속에서 말을 어물거리는 사람이 싫었다. 선택이 잘못되었으면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이 바뀐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 실은 엄청나게 큰 결정이다. 젊은 날 아빠의 결정은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았고 숙제처럼 남아 자식들을 괴롭힌다. 



애증, 부모를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이 오랫동안 엉켜 있었다. 그 엉킨 마음도 세월이 흐르니 원망은 옅어지고 애틋함이 커진다. 강하고 컸던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모습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 어디든 자식들 데리고 다니고 서울까지 동행해서 이사를 챙겨줬던 아빠가 혼자서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무서워한다. 걸음걸이와 행동이 느려진다. 작은 선물 하나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보며 행복해한다. 인생의 정점을 지나 외면적 삶이 단순해지고 몸이 노쇠해지는 부모를 보면 의식에 떠다니는 묵직한 원망 덩어리가 허무하게 부서진다.


애틋함이 커진다고 미움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부서진 덩어리가 옅어지고 희석되었지만  잔유물이 여전히 남아있다. 한동안 이 잔유물을 없애고 새로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잔여물은 걸러도 망 틈새로 자꾸만 빠져나간다. 내가 미련하게 느껴진다.  유년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스무 살 이후 주체적으로 산 시간은 내 세계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중요한 순간, 마음이 옹졸해지고 용기가 사그라지는 걸까. 분명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현실인데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과거의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기분일까. 한 발 내디딘 것 같다가 자꾸만 과거로  끌려들어 가는 것 같다.  언제까지 잔유물을 붙잡고 있을 것인가. 이렇게 두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이만큼 옅어졌으니 이대로 둬도 괜찮지 않을까. 완벽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바뀌는 것만이 의미 있는 것일까. 이제는 있는 그대로 놓아주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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