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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코치 Sep 15. 2023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가

문제는, 누가 그것이 선한 목적이라고 판단하는가?


나는 영감을 받은 글을 볼 때는 어떻게 해든 캡처를 해서 보관을 하고 가까운 지인들과 나누는 것을 즐겨한다. 문제는 이 보관 작업을 주로 SNS에 하는데 세상 흥망성쇠에 따라 시기별로 잘 나갔던 SNS가 달라서,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페북, 인스타 등등 다양하다.



그중 2018년에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던 글들이 뭐가 있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지금 다시 봐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이 있었다. 게다가 5년이 지난 지금, 같은 글을 봐도 생각이 달라지는 포인트가 있어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은,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유시민_청춘의 독서



인간은 나름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방법적인 면에서 '악한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고 '선한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인가의 판단은 당신 자신의 가치에 달린 것이며, 훗날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이 맥락에 '악'해 보이는 목적도, 사실상 어떤 맥락에서는 '선'한 목적이 될 수 있음이 아닌가.

예를 들어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이 누구에게는 '악'이지만, 누구에게는 '선'한 목적으로 포지셔닝되는 것처럼.




회사를 경영하는 방식도, 모두 리더의 관점과 가치에 따라 '선'하게 보일 수도 '악'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많은 경영자들이 '나름의 선한 목적'을 가지고 기업을 경영한다. '나름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그것이 주관적인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적을 선한 수단으로 이루고자 하는 조직이 결국 지속 가능하고 오랫동안 존경받는 기업이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저 글을 그때 포스팅했나 보다. 5년이 지나 더 많은 경험을 한 지금,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약간 관점이 달라졌다.


- 세상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선한 목적의 판단은 누가 하며, 언제나 선한 수단만 사용해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 말이다.


- 악한 목적임에도 종국에는 결과론적으로 선한 목적이 될 수 있고, 그것을 달성하는데 반드시 선한 수단으로만을 사용할 수는 없다.


- 선한 목적이라 해도,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는 말도 동의하기 어렵다.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않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거나, 혹은 정신적 고통이 생겨나지 않도록 자기 보호 기제가 발동되어 진짜 고통 없이 악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악한 수단의 실행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혹은 느끼지 않는) 리더로 있는 조직은 조직 전체가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악한 수단을 사용함에도 '나름의' 선한 목적을 위한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라고 생각되면 악한 수단에 정당성이 생긴다. 악한 수단을 실행함으로써 정신적인 고통을 느낀다면, 방법적인 면에서 좀 더 조직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악한 수단을 실행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gracefully 실행한다고 종종 표현한다 (한국어로는 우아하게?). 이러한 방법으로 악한 수단을 실행한다면 조직 구성원은 좀 더덜 아프게, 덜 괴롭게, 회사를 지속 신뢰하며, 회사가 악한 수단으로 이루려고 하는 선한 목적을 믿으려고 노력한다. (사람은 원래 자기가 속한 집단을 믿으려는 습성이 있다. 조금만 신뢰를 주면 회사를 믿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을 쓸 때에도 우아하게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gracefully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종종 쓴다.





어떤 것이 graceful 하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가?

얼마 전 트위터와 메타 (페이스북)의 대량 해고 사태를 처리한 두 CEO의 모습에서 grace의 유무를 본다.


대규모 해고 단행한 머스크·저커버그…다른 점은?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778297&memberNo=2886464&vType=VERTICAL



비록 한 회사는 인수한 회사의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한 것이고

다른 회사는 창업주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자신의 회사의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한 것이라 방식이 다를 수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한참 잘못된 것이다.



grace는 결국 인간 존엄, 인간존중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처지이던 똑같이 적용된다.

두 회사의 CEO의 리더십과 공감력의 차이가(인간의 정신적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 결국 grace를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grace는 리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이 '존중'받았다고 느껴질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메타의 직원들은 해직 메일을 받고도 회사에 감사하고 훌륭한 경험을 했다고 SNS에 이야기하지만 트위터의 직원들은 이 모든 해직 과정이 힘들었고 악몽 같았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리더들은 자문해야 한다.


- 나의 목적은 선한 목적인가? 어떤 맥락과 관점에서?


-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선한가 악한가? 어떤 맥락과 관점에서?


- 어쩔 수 없이 악한 수단을 써야 한다면, 나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가?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


- 심리적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악한 수단을 gracefully 이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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