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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ul 27. 2016

Just be nature

자연의 의지를 가질 때. 애니메이션 <곰이 되고 싶어요>

 자연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마치 신의 지루함을 달래주려는 듯, 시시각각 자아내는 숨 막히는 풍경은 그를 위한 단어를 찾기 힘들게, 그저 경이롭다. 그 풍경 속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아늑하고 오목하게 담겨 있는 동물들. 그들에게 사나운 야생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들 거추장스러운 가식은 존재하지는 않을 터. 그래서 나는 자연을, 그리고 동물을 무척 사랑한다. 


"다시 태어나면 고래로 태어나고 싶어요."


 라고-, 2009년에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고래와 관련해 언젠가 꺼낸 호기로운 말이다. 물론 그때의 마음에 한치의 거짓은 없었으나(지금도 그렇고), 그 이야기가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나오는 건 조금 부끄럽긴 했다. 이번 생애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지만 다음 생애는 반드시 고래로 태어나길 진심으로 바랐다. 

 

 엄.. 이왕이면 크기가 큰 고래로? 

단편애니메이션 <고래> 컨셉 아트워크

 전 지구를 누비는 광활한 활동범위.

 웅장함 속에서 빚어내는 섬세한 움직임.

 바다의 다정한 침묵하에 좀처럼 누설되지 않은 신비로운 그들의 삶.

 존재만으로 하나의 멋진 풍경이 되는 미친 존재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건 고작 작디작은 크릴새우나 정어리라니(아.. 귀여워) 


 이 모든 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다만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과 오염으로 인해 그들의 영역이 점점 위협받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미래의 고래로 태어난다면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 그러니 그냥 다시 태어난다면 몇백 년 전의 고래로 태어나는 걸로 하자. 



"나는 사람이 아니라 곰이에요. 곰이 되고 싶어요."

여기, 다음 생애도 아닌 현재 인간의 모습인 채로 곰이 되고 싶은 한 소년이 있다. 

따뜻하고 안전한 사람의 집을 벗어난 소년은 야생의 북극곰의 품에서 건강하게 자랐다. 모습은 달랐지만 그는 굳건히 자기가 곰이라 믿으며 자연 속에서 삶을 배워나간다. 애니메이션 <곰이 되고 싶어요>에서의 이야기이다.

선의 완만한 표현이 퍽 부드럽다.

차가운 얼음이 주를 이루는 풍경이지만 그림을 이루는 색감과 선의 느낌이 포근하고 부드럽다. 종종 표현 방법이 투박하고 직설적인 느낌이 들지만 사람과 동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가식 없이 솔직해서 보기 좋다. 등장인물들의 슬픔, 기쁨, 당황스러운 감정에 어떠한 왜곡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면 된다. 이렇듯 이야기가 명료해서 아이와 어른,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인 것 같다. 동화가 원작이라는데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언어는 프랑스어다. 한국어 더빙 버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애니메이션에 비해 대사량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므로, 사용 언어가 애니메이션을 보는데 큰 장애가 될 것 같지는 않다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사실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곁에 두고 곱씹는 건 유년기에 나를 둘러싼 환경 탓이다. 두꺼운 종이에 슬며시 물이 스미듯, 시골에서 보냈던 그때의 기억은 점차 내 정체성을 짙게 하는 큰 요소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 때문에 자연이나 동물을 바라보는 시간과 관심이 커지면서 이와 관련된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도도 덩달아 높아졌다. 물론 동물이 등장하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본 그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인 것 같았다. 조금은 색다른 시각으로 그네들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이 없을까 하던 찰나,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발견했다. 언젠가 내가 오글거리게 읊었던 그 문장을 떠올리면서.


야생의 곰, 그를 죽여야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애니메이션 속 세상은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과 판타지스러운 부분이 미묘하게 교차한다. 또한 아이를 도둑맞은 에스키모 부부와, 아이를 한 마리의 야생 북극곰으로 기르게 되는 곰의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대결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품음으로써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는다. 물론 여러 갈등이 오가는 속에서 아이는 결국 인간의 삶이 아닌 야생곰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이 때문에 자연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조금 더 무게가 실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아이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되는 에스키모 부부의 모습 또한 놓치지 않는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 공존 혹은 화해의 모습까지 애니메이션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몇 만년에 이르는 광활한 시간 속에서 지구는 자연, 동물, 그리고 사람이 서로 직 간접적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기나긴 흐름을 이어내려왔다. 과거,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 이루는 삼각형 꼭대기에는 자연의 룰이 큰 지배 원칙으로 작용했던 것에 비해 이제는 인간이 그 삼각형의 맨 위쪽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의지와 행동으로 자연의 일부를 살리기도 하고 반대로 죽이기도 하는 거대 인류의 시대. 그 덕분에 물리적인 불편함을 지우며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을지언정, 아마 지구의 입장에서 인간의 의지만 믿고 흐름을 맡기기에는 여간 불안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자연은 그저 그 자리에서 흘러갈 뿐, 어떠한 의지를 가지지 않기에 자연과 인간의 싸움에서 자연은 늘 지기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 소년이 아이러니하게 '자연의 의지'를 대변하며 그 삶을 선택하는 이야기라니. 그 때문에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다른 애니메이션들보다 <곰이 되고 싶어요>가 조금 더 색다르게 다가왔다. 일방적인 인간 우위의 시점에서 다룬 이야기가 아닌, 자연과 인간 각각의 모습을 꽤나 균형감 있게 다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부분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었노라, 글을 쓰면서 되내게 된다.


 얼마 전, 어릴 때 살던 고향 마을에 갔었다.


 여전히 깡시골 of시골이었지만, 마을 한편을 지지하고 있던 산자락이 댕강 잘려 있어 그 기운이 예전 같지 않아 보였다. 대도시와 이어지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라 했다. 5:5 가르마처럼 정 중앙이 떡하니 내리 찍힌 산을 바라보며 나는 산이 좀 많이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산이 의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쪼갬을 당하기 전에 어디로 멀리멀리 도망이라도 갔을 터였다. 


  개인의 미미한 힘으로 지구에 드리운 힘의 균형을 깨뜨릴 수 없다 보니 그저 지금보다는 사람들이 선한 의지로 세상을 바라보길 기원할 뿐이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우리는 결국 각각의 다른 모습이 아닌 지구라는 거대한 그릇에 담긴 소소한 풍경의 일부일 테니까. 이 애니메이션이 그러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작은 단추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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