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EK Miyoung Jul 02. 2015

촉촉한 비디오의 추억

어린 사자 심바가 소녀들을 울렸네 <라이온킹>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애니메이션은?


스스로 던진 이  질문을 통해 나온 답으로,

오늘의 주제는 너로 정했다!

짜잔~

 그 유명한 '라이온킹'.

 지나치게 유명해서 더 얘기할 거리도 없는 이 애니메이션을 얘기하게 된 건 물론 위의 물음에 자답한 것도 있지만, 이와 관련한 특별한 기억하나가 떠올라서다.


 정확한 년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199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나와 세 살 터울의 언니가 둘다 꼬꼬마 초등학생이던 때의 일.

세탁기가 없어 어머니가 매일 매일 손빨래를 해야만 했던 집에 전자제품이 대거 들어온 적이 있다. 아마 아버지의 사업과 관련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야기된 일이었다는데, 어린 내 관심사는 덩치 큰 아저씨들이 줄줄이 이고 들어오던 처음 보는 전자제품들이었다. 

세탁기, 전자레인지, 화면이 큰 TV, 그리고 비디오. 

대부분이 관심 밖 물건인데 비해 번쩍번쩍한 새 TV와 '누구네 집에는 있다카더라'식의 흡사 전설 속 물건인듯했던 비디오의 등장은 어린 자매에겐 그야말로 '혜성 같은 등장'과도 같았다.  


덕분에 유치원 재롱잔치 비디오테이프(유치원 측에서 녹화해서 테이프를 팔았었다)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읍. 면. 리 단위에 딸린 단출한 농촌마을이었다. 아담한 규모만큼이나 즐길거리는 많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맘껏 뛰어다닐 공간은 그 어느 곳 보다 넉넉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느샌가 풀냄새가 한 움큼 나는 것 같다. 마냥 아름다웠다 말할 순 없겠지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 자연이라는 커다란 화폭에 담겨 눈부신 풍경들, 그리고 계절마다 여기 저기서 뿜어나오던 생기 가득한 냄새- 이 시기에 만들어진 감성과 기억은 지금껏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드는 내 작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작은 동네를 벗어나 그나마 '면'단위의 시내로 나가면 작은 비디오 대여점이 하나 있었다. 집에 비디오를 설치한 후 아버지는 종종 퇴근길에 우리가 볼법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주시곤 했다. 검은색 비닐봉투에 쌓여서 아버지 손에 들려오던 비디오 테이프. 어느 날인가 그 속에 들어있던 게 바로'라이온킹'이었다. 우리 자매에게 있어 비디오의 역사는 라이온킹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줄 그땐 몰랐지.


 라이온킹을 틀자마자 나와 언니는 깊숙이 영상에 빠져들었다. 마치 화면이라는 청소기에 흡입당한 듯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을 죽이고 화면을 주시했다. -심바가 아빠를 잃던 순간 얼마나 놀라고 황망했던지!- 영상이 끝났을 때 나와 언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린 맘에도 뭔가 대단한 걸 봤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얼마간 라이온킹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더 강하게 빠져든 건 내가 아닌 언니 쪽이었다. 심지어 심바가 너무 불쌍하다며 식사 도중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기에 이른다.(목이 메인 것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그 상황도 참으로 강렬했던지라 라이온킹 영상을 떠올릴 때마다 언니의 눈물도 함께 떠오른다. 그땐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이 뭔지 추측치 못했는데, 아마 세 살 위의 언니가 나보다 더 먹었을 밥의 양만큼이나 더 많은 감동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물의 밥 사건' 이후, 우리 자매는 어떻게 했을까?


비디오 반납을 못 하도록 아버지께 눈물로 애원하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보는 자매의 '쌩떼쇼'를 바라보며 부모님 역시 적잖이 당황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이 떼를 쓰며 우는 것에 화를 내실법도 한데(보통은 그러하셨으므로,) 감사하게도 이번만큼은 우리가 받은 감화의 크기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셨는지 흔쾌히 존중해주셨다. 아버지는 비디오가게 사장님과 오랜 딜 끝에 2만원을 내고 비디오테이프를 사수해 오셨다. 

이제 이 비디오는 우리 자매의 소유다! 

이후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주 오랫동안 라이온킹을 보고 또 봤다. 

 

 

티몬과 품바를 빼놓을 수는 없지~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던 어느 날이 되어,  우리는 영상에 나오는 대사와 노래를 자연스레 통째로 외우게 됐다.(한글 더빙 버전이었다.) 그것은 정말 별 노력 없이 이뤄진 일이라 둘다 놀라워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같은 방에서 잠들기 전 함께 하는 하나의 놀이처럼 애니메이션의 한 대목을 골라 서로  대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잠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까지 반복해서 봤는지 웃기고 어이없기도 하지만 우리 자매의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가 됐다.

 

보통,

 라이온킹으로 말하자면, "웅장한 배경과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 완성도 높은 연출 등등..." 가히 명작으로 불릴만한 풍성한 요소를 갖춘 작품이라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도 다양한 경험이 있어야 비교, 터득할 수 있을 터. 아이의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는 어른의 그것처럼 그리 입체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우선 이러 이러한 것들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이 참 좋았었다-로 기억되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장점들은 시간이 지나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땐 그냥 좋았다. 우린 뭔가에 홀리듯 그 세계에 홀딱 빠져들었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즐겼다. 


 지금처럼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게 된 이후로 이때만큼 애니메이션에 순수하게 접근하기가 어려워졌다. 영상을 보면서 분석하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런 행동이 의식될 때마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저 좋아서 좋아했던 그때의 마음과 지금도 집 한 편에 놓여진 노란색깔의 라이온킹 VHS 비디오 테이프가 떠오른다. 

 끝없이 무한 반복할 것만 같았던 라이온킹 다시 보기도 어떤 시점부터 그만뒀다. 통으로 외울 수 있었던 노래와 대사들도 자연스레 잊혀갔다. 어쩌면 영원하리라 여겼던 순간들이 다른 순간으로 옮겨지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내 마음과 지금 내 마음의 간격도 그렇게 지나온 과정만큼이나 멀어져 버린 것을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아쉽지만, 그리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지나온 덕에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니까. 이로써 발아된 내 마음이 앞으로 어디를 지나 어디까지 가게 될지 여유를 갖고 지켜볼 것이다. 


저어~기 뒤에서 티몬과 품바 그리고 어린 심바가 노래를 부른다.

파쿠나마타타-!

그래. 우선은 걱정 말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을 때까지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이전 04화 엄마라는 이름의 슬픈 풍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