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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Dec 02. 2015

지금, 마법이 필요한가요?

지친 일상 속 가난한 마법, 일루셔니스트

 실뱅 쇼메(Sylvain Chomet)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를 처음 접했던 건 국내에서 개봉 전인 2010년 초여름 때의 일이다.


 아일랜드로 인턴을 떠나기 직전. 일이니 학교니 한참  정신없이  이것저것 알아보던 시기였다. 


 지구가 무척이나 매끄럽게 둥근 탓일까, 아니면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거리와 상관없이 닿아지는 끈이 있는 탓일까. 정말 우연히 스코틀랜드 던디 지방에 살고 있는 학교 선배를  소개받게 됐다. 함께 앙굴렘에서 공부하던 친한 언니가 여행하며 만난 한국분들 중 한분으로, 그가 내가 다녔던 학교와 학과를 졸업한 직속 선배였다는 것이다. 던디에 있는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을 한다기에 언니로부터 받은 이메일로 무작정 메일을 보내봤다. 혹 외국에서 취업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볼 때라 이래저래 궁금한 부분이 많았다. 무모하게도 같은 학교와 학과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들이미는 격이 되어버렸지만 필요하다면 어디든 밧줄을 던져봐야 했었다. 거기에 뭐가 걸려 올라올지는 몰라도, 하다못해 걸려 올라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던져봤으므로 후회는 없는 일이 된다.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다행히 맘씨 고운 선배는 얼굴도 모르는 후배의 방문을 흔쾌히 응해 주었다.  그러면서 본인은 물론 다른 한국 애니메이터들도 참여했다는 프로젝트를 하나 소개했는데-


 그게 바로 '일루셔니스트'였다. 

한국 애니메이터들도 참여한 '일루셔니스트'

  언뜻 들었던 실뱅 쇼메 감독의 후속작에 한국 애니메이터들도 참여했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고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그림체와 색감만으로도 '벨리빌의 세 쌍둥이'를 만든 그 감독! 이 딱 떠오를 만큼 이 영화 역시 감독 특유의 개성이 듬뿍 묻어나 있다. 후에 던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방문해 선배로부터 이와 관련한 몇몇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감독이 워낙 섬세한 원동화 작업을 추구하는 덕분에 애니메이터들이 하루에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의 양이 무척 적었고 그 탓에 개봉 시기가 애초에 예상했던 시기보다 늦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실뱅 쇼메 감독의 여타 다른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가 3D더 아닌 2D 그림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표현의 레벨은 가히 최고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만약 이 애니메이션을 직접 본다면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흔한 말로 애니메이터를 갈아 넣었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얗게 타 버렸을 애니메이터들에게 피-쓰..



 벨리빌의 세 쌍둥이(The Triplets Of Belleville) 이후 무려 7-8년 만의 후속작이다. 

 아름답지만 어딘지 쓸쓸한 풍광과 실뱅 쇼메 감독의 섬세한 인물 묘사로 보는 눈이 호사를 누리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일루셔니스트-라는 반짝반짝 빛이 날 것만 같은 타이틀과 어울리지 않게 그 속에 녹아든 삶의 모습은 그저 팍팍함과 고단함으로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빛바랜 포스터처럼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몸도 기술도 늙어버린 마술사. 결국 설 자리를 잃고 시골에 있는 낡은 술집에서 마술을  팔아먹고사는 처지가 된다. 그곳에서 만난 순수한 시골 소녀 앨리스는 마술사의 낡은 마술을 진짜 '마법'이라고 믿어주는 단 하나의 존재가 된다. 마술사는 그녀의 순수한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남몰래 갖은 일을 하며 소녀의 '순수함'을 지키려 애쓴다. 결국 마술사의 헌신으로 마법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한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가난한  마술사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기라도 한 듯 그녀의 곁을 떠난다. 


'마법은 없어'

 마술사가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쪽지처럼, 눈부시진 않더라도 아름다운 삶의 마술을 기대하고 이 애니메이션을 지켜봤던 내 마음은 어쩐 일인지 영화가 끝나자 비가 내린 듯 눅눅해지고 말았다.


 실뱅 쇼메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어떤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그는 삶 곳곳에 깃든 아름다움을 면밀하게 살필 줄 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 속에 몸담고 살아가는 가난하고 늙어  힘없는 사람들을 더욱 진한 시선으로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그들을 동정이나 한낯 치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함께 하는 웃음과 해학, 따뜻함을 가감없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물론 사회에서 차갑게 내몰리는 그들의 현실 역시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 무거운 감각으로 풀어낸다. 겹겹이 다른 색깔의 껍질을 두른 채 존재하는 삶의 모습을 다양한 시선으로 들춰내는 감독의 솜씨에 나는 늘 감탄, 또 감탄한다. 



 20살 수업 시간에 처음 접한 실뱅 쇼메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벨리빌의 세 쌍둥이'는 여러 의미로 충격이었다.

누가 봐도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는 건 알겠는데, 대체 뭐라는 건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어떤 판단도 서지 않던 그 오묘함. 함께 영화를 관람하던 동기들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반은 그 자리에서 잠들었고, 나머지 반은 인생 애니메이션으로 기억하고 있을 정도니까.

실뱅 쇼메 감독의 할머니 사랑이 돋보이는 벨리빌의 세쌍둥이.

 시간이 지나 다시 봐도 이 오묘함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감독의 짓궂은 웃음 소리가 들리는 건 왜였을까.

 그의 단편 The Old Lady And The Pigeons를 비롯해, 벨리빌의 세 쌍둥이, 그리고 최근 실뱅 쇼메 감독의 실사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이 감독, 정말 노인들의 얇고 가는 주름을 사랑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한 몇 달 고된 일상을 보내고 돌아왔다.

할 일은 많았고 시간은 늘 빠듯하게 조여와 내 일상을 채찍질해댔다. 덕분에 마음에 따뜻한 햇빛  한 줌 쏘여 줄 여유도 없었고 그 덕에 마음이 허옇게  뜬 지 오래다. '누군가 마법처럼 뾰로롱-지팡이 한 번으로 이 지친 일상에 드리워진 그늘을  거둬준다면'이라는 생각이 간절할 때 문뜩 예전 생각에 잠겨 이 애니메이션을 회상하게 된다. 물론 애니메이션에서도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이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면 젊은 혈기로 가열하게 아일랜드를 쏘다니며 일을 하고, 처음 만나는 선배를 뵙겠노라 소형 비행기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날아갔던 기억에 마음을 뺏기게 되니까- 그때를 생각하며 잠시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게 된다. 상상만으로 어딘가 멀리 날아갈 곳이 있다는 것도 꽤나 괜찮은 '일상의 마법'이다.


 전공 탓인지 취향 탓인지 유달리 일상의 어떤 부분과 특정하게 연결되는 애니메이션이 참 많다.(그 덕에 이 매거진에 글을 올릴 수 있었겠지만.)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여러 줄기의 강이 흐르고 있다면 곳곳에 애니메이션들이라는 작은 다리들이 그 강을 연결 짓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계속 계속 이쪽 세상에서 살다 보면 더 많은 강과 다리를 만들게 되겠지. 한번 기대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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