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신세한탄하고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만 좀 해라. 도대체 넌 왜 그러냐” 하고 얘기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면 아이라고 들어보셨죠?
네, 제가 저의 내면 아이에게 그렇게 또 다그치고 있더라구요.
동기부여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죠. 부정적인 사람들과 멀리하라고요.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과 만나라구요.
그런 그들의 기준에 어쩌면 저는 부합되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죠.
그리고 실제로 좀 웃어라, 더 많이 웃어라 등등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참 듣기 싫었는데요. 제가 나에게 그러고 있는 겁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죠. 싫어하는 일을 스스로에게 하는 격이라니….
예전에 제가 그랬거든요.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한대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기로요. 아무리 부정적이고 지질한 말을 해도 알아주기로요. 그렇다고 그 안으로 빠져들겠다는 말은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내 안의 내 말을 들어주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모습을 위해 공감하고 격려해줄까 그런 고민을 하기로요. 그런데 나도 타인과 다를 바없는 속물인거죠. 네 속물, 속물이요.
타인의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많죠.
특히 훈계를 두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이죠.
이해는 하지만 특별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이로는 남기 힘듭니다.
오지랖을 떨지 맙시다. 저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제가 신세한탄을 하고 있으니, 현실적인 내가 “너 그러다 망해.
이미 망했는데, 어떻게 하려고 또 그 지경이야!”하며 쏘아붙이는 내가 보입니다.
정말이지 구제불능입니다. 이해와 공감, 격려가 필요한 시점에서 또 이러니, 내면아이는 또 상처를 받습니다. 어릴 적 엄마에게 떼를 쓰고 나는 속상하다고 이야기 하고 하고 싶었는데요. 저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한 번도 그렇게 엄마에게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어요.
물론 반항하기 전까지는요. 반항은 떼쓰기와 다르다고 봐요. 엄마에게 솔직하게 표현한 내 감정을 공감받고 인정받은 적이 없으니, 반항으로 나타난 것이죠.
반항은 제가 11살이었는가 그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제가 엄마에게 반항할 수 있었던 건 큰 어른으로 생각했던 엄마의 부도덕한 점을 본 이후였죠.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알고 있는 모습은 당시 저에게는 매우 추하고 도덕적 타락으로 보였어요. 그때부터 이때다 싶어, 엄마에게 반항하기 시작 했어요. 물론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긴 했지만 말이에요.
중요한 건 제가 반항을 한 것이지, 떼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반항과 떼쓰기는 차이가 분명히 있으니까요. 떼쓰기가 허락된 어린시절을 보내셨나요? 그랬다면 내면아이가 안정적인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봐요. 저는 그런 어린시절을 보낸 분들이 참 부러워요. 떼쓰기가 허락되었다면 공감과 격려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저는 어릴 때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안되는 환경에서 자란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원하는 건, 엄마의 사랑, 부모의 관심같은 매우 감정적인 것부터, 하고 싶은 걸 할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경제적으로도 어느정도 밑받침이 되어야하고, 부모의 지지도 필요한 것이죠. 저는 그것과 거리가 먼 어린시절을 보냈어요. 그래서 감정 표현이 서툴고, 원하는 걸 말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어요. 참 안타까운 점이죠. 이런 내가 성인이 되어, 어릴 적의 나를 이해하고, 그 아이 그대로 내 안에 남아있는 어린 나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하는데요. 오히려 엄마가 했던 것보다 더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신세한탄하고 있는 나에게 말하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다, 얼마든지 풀릴 때까지 말하라고요. 나에게 말하지 누구에게 또 말하겠냐구요. 얼마든지, 언제라도 이야기하라고 말이죠. 그렇게 안전하게 얼마든지 머물다 가라고요. 조건없이 사랑하고 공감한다고 말이죠. 혹시 저와 같은 경우라면 독자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어린 아이에게 매몰찬 조언보다는 한없는 사랑으로 따듯한 온기를 불어 넣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