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처럼 생겼었다. 버튼이 깜빡이면 손잡이를 당길 수 있다. 이윽고 안쪽의 이중문이 스스로 열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캐나다의 엘리베이터이다. 처음 보는 진귀한 풍경이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폐쇄공포증이 생길 것 같기도 했다.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으니까. 처음은 설레기도 하지만 이 경우처럼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경우도 있다. 그 뒤로로 한참을 냉장고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공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에게 하나 더해진 무엇이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 손잡이가 달린 문이어서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영화 <라비린스>인가의 한 장면처럼, 옷장문을 열고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꿈의 세계를 탐험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다.
문은 늘 그런 감정을 일으킨다. 그 문이 냉장고 같은 문이든, 손잡이 없는 문이든 무관하다. 대표적인 문은 우리 집 대문이다. 아주 어릴 적 대문은 초록이었다. 이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파란색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문 색에 참 무심했다. 부모님이 색을 이색 저색으로 바꾸었을 때는 그때마다 이유가 있고, 감성이 달랐을 텐데. 부모님의 감정을 생각해 본 적이 이렇게도 없었다. 아버지도 엄마도 각자 좋아하는 색과 라이프 스타일이 있었을 텐데, 그동안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는 일이 대문을 활짝 여는 일이다. 어릴 적, 일곱 식구가 복작거리며 살았을 때는 엄마가 또는 아버지가 어느새 대문을 열어놓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정신없이 지나는 하루를 부모님은 열심히도 살아내셨다. 새벽부터 방문하는 이웃들 챙기느라, 가족들 아침준비를 하느라 엄마와 아버지는 늘 그렇게 분주하셨다.
세월이 흘렀고 아이들이 성인이 된 지 오래다. 이제는 엄마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으나 대문은 여전히 아침이 되면 열린다. 엄마가 아직 지키고 있는 습관이다. 대문이 여는 행위는 하루를 맞이하고, 이웃에게 인사를 전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어느 곳을 방문하든, 문을 유심히 보니 습관이 생겼다. 그 집 대문이 전하는 어떤 에너지가 느껴진다. 어떤 집은 매우 선비 같고, 어떤 집은 러블리하다. 또 어떤 집은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어떤 장식으로 되어있든 문을 보면 늘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어느 집을 방문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문. 그런 문을 조심히 정성스럽게 열고 들어가듯 사람에게 가는 문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정성스러운 기대감으로 다가갈 준비가 되어있다면 우리는 관계에서 조금 더 성숙한 사람들로 남게 되지 않을까. 좋은 상호작용의 대표적인 예가 문이 아닐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