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가 없다는 걸 안다면 한계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는 도가 튼 사람은 아니다. 아직도 미흡하다. 매우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도 있는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를 규정짓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어떤 이는 굳이 그럴 필요 있어? 그냥 현재의 삶에서 즐겁게 살면 되지, 뭘 그렇게 심각하게 살아? 그들의 말도 맞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가 해야 할 숙제가 많다. 내가 그들이 아닌 것처럼 그들은 내가 아니다. 혹시 독자분들도 누구에겐가 같은 말을 들었다면,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이렇게 해보라.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그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갈길과 그들이 갈길이 다름을 먼저 인정하도록 하자. 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알바가 아니다. 가족이라면 그래 그 말도 맞지라고 흘려보내자. 가족이라고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날을 생각의 차이로 부딪쳤는가. 나는 나고 그들은 그들이다. 쓸데없는 자책감이나 쪼그라듦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그걸 되도록 빨리 깨닫는 게 좋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깨달음을 순간순간 잊어버리기도 한다. 내 삶을 누가 대신 좀 잘 살 수 있게 부축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런데 생각보라. 나에게 기대는 사람들이 버거운 만큼, 그들도 나의 기댐이 버겁지 않을까. 나 한 몸 돌보기도 힘든 세상에 타인을 부축하고 살아간다는 것 두 배의 힘이 들지 않겠는가. 상대가 힘이 들지 않는다면야 다행이지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내가 바로 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채우는 작업을 지금부터 하자. 상상해 보자.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외로운가? 실직으로 삶이 바닥으로 내려갔는가? 또는 잘 사는 지인이 부러운가? 어떤 점이 부러운가? 타인이 부럽다면 나는 어떤 상태인가? 내가 원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어떤 어디에서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는가?
“내가 어떻게 그걸 해요?” 몇 년 전에 수시로 하던 말이다. 어떻게 내가 그걸 하느냐고 타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바보 같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 돌아왔다. “자신에게 한계를 짓지 마세요.” 내 말습관을 돌아보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하지 못한다. 어떻게 내가 그걸 하느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등등 나를 규정짓고, 한계를 짓는 부정적인 말을 일삼아 왔다. 그 누구도 아닌 가장 소중한 나에게. 내가 한 말은 가장 먼저 내가 듣는다. 혼잣말도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생각을 조심하자.
사람들 사이에 수준이 있다고 믿었다. 나름대로 설정한 사회적인 수준이다. 선생님, 변호사, 의사, 정치인 같은 사람들은 권위가 있고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부, 배관공, 캐셔, 배관공 등은 권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권위가 있는 사람들은 결정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큰 기관이나 제도적 사회에서 한 순간 나를 몰락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선생님은 학교라는 제도에서 한 번에 나를 제도 밖으로 내동댕이 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료인을 변호하는 변호사는 고용하기 위해 내가 들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많고, 승소할지 알 수 없는 게임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다. 사건을 함께 잘 준비해야 할 존재이다. 대통령은 한 국가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사회체계의 최고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이 또한 한마디말로 많은 영역에서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올 힘이 있는 사람이다 등.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에게 결국 두려움을 느끼는 겁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보다 못하다는 인식으로 경계를 짓고, 한계를 짓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내가 한계를 지었던 습관을 들여다본다. 두려움에서 오는 말습관과 한계는 어릴 적에 형성된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또는 다른 장소에서 듣거나 경험했던 순간을 돌이켜보자. 나는 어릴 적에 엄마가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나와 달리 목소리가 크다. 나는 아버지를 닮아 목소리도 작다. 엄마는 큰 목청을 타고난 사람일지도 모른다. 형제자매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건 엄마의 크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청각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목소리가 작은 작은오빠와 나의 경우는 후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엄마의 큰 목소리는 선생님처럼 사회적인 권위를 갖춘 사람들 에로 옮겨갔다. 기업의 대표나 상사에게도 같은 트라우마가 투영되었다. 트라우마를 없애기 위해 부로 권위 있다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있고 나에게 없는 게 무엇인지 관찰했다. 그들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엄마라는 자신감, 선생님이라는 자신감, 상사라는 자신감이었다.
어떤 이가 그랬다. “그들도 다 밥 세끼 먹고, 똥 싸는 나랑 같은 인간이에요.”
그래, 그 말이 맞다. 우리는 사실 별반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다.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은 사회제도에 나타난다.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 선생님이 그럴 수 있을까? 내 변호사가 그럴 수 있을까? 내 의사가 그럴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해도, 주눅이 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쩔 수없이 불편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해결점을 찾는 것이 주눅 들고 쪼그라드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 관계라면 관계정리를 한 번 하고 가는 것도 좋겠다.
타인으로 인해 내 인생과 나를 한계 짓는 삶을 그만 살도록 하자. 내 생각이 내 언어로 발현된다. 불편하면 차라리 불편하다 말하는 게 낫다. 그래야 상대로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최근 들어 자주 쪼그라들고 주눅 드는 상황이 있다. 나를 남 앞에 표현하는 일이 버거울 때가 그렇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나의 상태를 인정하고 벗어나려 할 수밖에. 내가 그러하다는 상황을 인정하는 순간이 나의 한계를 벗어던질 시작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무한계적이고 무경계적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시작이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사는 게 나에게 더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