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플러 Miyoung Aug 10. 2023

전깃줄


능소화가 담쟁이 처럼 늘어진 8월. 이태원 골목길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어제 부터 일본을 지나 한국에도 태풍이 상륙한다고 떠들썩이다. 피해가 없도록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재난 메세지가 하루사이에 세네번은 온 것 같다. 이미 남쪽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강한 바람이 불기도 하고 갑자기 소나기도 내렸다고 한다. 후덥찌근했던 여름 공기가 태풍때문인지 조금씩 시원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쌍무지개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커뮤니티 단톡방에 멋들어진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같은 시각 나는 멀리 하늘을 장식하는 구름에 푹 빠져 있다. 꼬불꼬불한 모양도 보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절도있게 가로무늬로 하늘을 장식하는 구름도 있고, 그 무엇보다 가벼울 듯한 새털 모양의 구름도 있다. 나는 모처럼 발견한 특이하고 예쁜 구름들을 핸드폰 카메라로 열심히 저장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얼굴에 스치고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는다. 신호등이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순간 오른쪽 멀리 건물들 사이에 나타난 오색찬란한 구름.  빨강 노랑 분홍 초록 보라. 선명한 파스텔색을 띈 띠모양의 물체가 위아래로 길게 늘어져 공중에 덩그러니 떠 있다. 태어나 처음보는 광경에 나도모르게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구름일까, 무지개일까. "우와! 저게 뭘까? 색이 어쩜 저렇게 예쁠까?" 콧노래도 절로 나온다.


하루가 지났다. 태풍이 제법 북상해서 서울에는 아침부터 비 소식이다. 평소대로 아침 산책을 나갈까 고민이 되긴했다. 그러나 빗속을 산책하는 재미도 있으니 고민도 잠시,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침 공기는 입추에 들어서인지 이틀 전부터 시원하다. 습도 높은 가을바람이 우산 아래도 들이친다.  우산을 들어 바람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나는 앞에 있는 전봇대 위에 시선을 멈추었다.


오래 전부터 이태원에 살기 시작했을때부터 비가오면 늘 주의가 환기되곤 한다. 전봇대에 주렁주렁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고압 전선들… 가느다란 전봇대에서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둘둘둘 말려있는 케이블도 심심치 않게 보게된다. 전선들은 옆에 떨어진 또 다른 전봇대로 이어지거나, 근처 건물로 이어지는 중간즈음의 지점에  “고압전선 주의”라고 쓰여진 노란색 표시판을 달고 있기도 하다. 위험하다는 신호다. 가까이 가거나 손을 대면 안될 듯 하다. 그런 전선들이 어떤 곳에서는 이어지지다 갑자기 무심하게 뚝 잘려져 땅을 향해 직선으로 대롱대롱 길게 늘어져 있다. 가끔 그 아래로 지날때면 가슴을 졸였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더욱 그렇다. 전선 아래로 맺혀있는 물방울이 이 동네에서 만큼은 그리 서정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하지만 한번도 사고를 접한 적은 없다. 그런 나날들이 여러해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만도 하다. 그러나 비오는 날은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전선을 보면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비가 오고 숲이 통제되니 오늘은 동네 골목길을 걷는다. 태풍의 영향을 아직 크게 받지 않은 모양이다. 바람에 날린 흔적도, 비에 쓸려간 흔적도 아직 없다.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골목길을 여기저기 둘러본다.


회나무로 41길. 오늘은 걷다보니 오래 전 살았던 곳을 지나가고 있다.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예전에 없었던 카페가 여럿이 생겼다. 이태원은 해방이후 특별한 도시계획이 없이 집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긴 골목길을 걷다가도 어느 순간 막다른 길에 들어서 누구 집 앞에서 길이 끊어지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주렁주렁 이어진 전선들에게도 이곳이 막다른 종착지 겠다. 전봇대에 엉켜있던 전선들이 결국은 갈 곳을 찾아가는 곳, 막다른 골목 끝에 있는 사람냄새나는 훈훈한 가정집 풍경이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잔뜩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전선들. 그러나 하나씩 제 길을 찾아가니 결국 최종 종착지에 도착하는 우리의 삶과 같은. 어지러운 전깃줄이 오늘따라 정겹게 느껴진다.


 

작가의 이전글 동네책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