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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Aug 16. 2023

필연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알게된다. 필연이었다는 걸,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일이었다는 걸.

과정 속에서는 뿌연 안개처럼 명확하지않는 일들이 일어남으로서 새벽에 여명이 떠오르 듯 서서히 밝아진다는 걸.


언어는 한정적이서 우리의 마음을 다 담지 못한다는 모순이 있다. 내 안의 말을 모두 꺼내어 언어화하는 작업을 거치고 말로 상대에게 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실수를 한다.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를 해야하니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니 실수는 필연이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해는 당연한 것이겠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기억은 언젠가 수면 위로 올라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전에 무라까미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를 읽은 적이 있다. 베스트셀러라고해서 그 내용이 너무 궁금했었다. 그래서 정말 큰 기대를 하고 읽었다 그런데, 결국 ‘이게 뭐야’하고 큰 실망을 하고 책을 덮었고 나는 참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너무 큰 기대를 해서 오히려 실망이 컸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왠지 모르는 여운이 남았다. 그건 너무도 미묘해서 어쩌다 뒤돌아보면 그림자의 끝자락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 여운이 분명있었다. 그러나 잊혀졌었다.


한참을 지나 수십년의 경험 뒤에 어느날 소설 속 장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이유는 무얼까... 그건 허탈했던 감정들이 조금씩 채워 졌기 때문이었다. 상실은 그렇게 조금씩 나의 마음 한켠에 집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을 상실하고 나를 상실하고 주위를 상실했다. 그 모든 과정을 결국 겪어서야 나는 성숙해질 수 있겠다고 프로그램화 된 것처럼 필연적이었다.


상실을 겪으며 필연적으로 생긴 또 하나의 인연이 있다. 바로 나와의 인연. 내가 나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때가 상실의 절벽 끝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절벽 끝에서 조금이라고 발을 밀치면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때 조금씩 발을 옮겨보았다.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조금씩 그렇게 나를 보듬으며 나를 위해.

그랬더니 글을 쓰는 사람도 되었고, 그림을 그리는 사림도 되었고, 국제 교류를 위한 소명도 갖게되는 존재가 되었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필연을 수용하고 툭툭 털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괜찮을 수도 있다. 상실이 주는 교훈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끝까지 내가 해야할 일일수도있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극적으로 나를 알아가고 찾아 갔으면 한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일은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에게 솔직해야하고 나는 나의 끝감정을 계속 파고 들어가 보아야했다. 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었나보다. 내가 여기 이곳에 있음이 그 증거이다.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나도 그렇다. 너는 너의 색깔대로 이 세상을 살면되고, 나는 나의 색으로 나의 세상을 그려가면 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영역을 존중하면된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작업은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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