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플러 Miyoung Sep 10. 2023

서울역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 힘드니 너가 힘을 줘.”

친구에게 나는 늘 이렇게 뻔뻔하다. 친구도 힘들 것인데… 


그냥 아무 말 말고 나에게 잘 될 거라 얘기해 달라는.. 나는 이런 이기적인 사람이다. 


일의 시작은 하늘에 지구만 한 구멍이 뚫렸음에 틀림없는 날 그 몇 주 전부터다. 영화를 보고 현실과 비현실에서 헤매고 있었다.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다. 아무튼 영화이야기를 하려는 것 아니니, 이쯤에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우울한 기분이 계속되던 때 나를 잡아준 건 일이었다. 일에 집중하면 우울감이 사라지긴 한다. 그런데 이 날씨가 문제였다. 아니면 무엇이랴. 일이 문제였던 걸까. 



보스와 마지막 미팅을 남겨두고 창 문 밖으로 바닥을 튕기는 빗방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2023년 여름에는 유난히도 비소식이 많았다. 비는 세차게 세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정해져 있던 미팅을 취소하고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리로 했다. 


그 사이 밀린 업무를 하고, 식사를 하니 다음 미팅 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프랑스 대사관으로 향할 차례. 보스는 미팅 후 바로 공항으로 가는 것으로 나와 결론을 짓고,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수트가방과 작은 케리어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그래도 모르니 호텔 컨시에지에서 까만색 장우산을 빌려 대사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프랑스 대사관은 좀 바뀐 구석이 있었다. 몇 년 전 공사 중이었던 대사관 한켠에 새로운 시설물이 세워져 있었다. 신분증을 맡기고, 시큐러티를 지나 미팅룸으로 향했다. 문화 담당관과 한국에서의 행사와 교류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했다. 당장 어떤 프로젝트를 하지 않아도 일면식을 터 놓으면 도움이 되는 것이 관계이다. 미팅은 잘 되었다.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다시 시큐러티를 지나 신분증을 찾아 대사관을 나왔다. 보스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보스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떠났다.


모든 순간에 만남과 헤어짐이 있음을 안다. 어떤 이가 있었다 사라졌을 때 채워졌다 비워지는 과정을 경험한다. 채워질 때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비어질 때 느끼게 되나 보다. 비워지고 사라짐, 그 사이에는 공간이 생긴다. 빈 공간이. 있었다 사라질 때 생기는 그 텅 빔의 세계를 아무런 미련 없이 잘 견디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디선가 다시 존재할 그와 그들. 양자역학의 이론대로 본다면 어쩌면 내 눈에서 사라진 그들은 이후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수 도 있지 않은가. 황당한 이야기지만 내가 알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 저 빛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보스가 떠난 뒤 비어있음이 다가왔다. 텅 빈 공간을 느끼다 부러 버스에 올랐다. 생각을 하기엔 버스가 최고다. 그저 멀뚱히 창 밖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니. 버스는 도시를 횡단하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나를 이동한다. 바람을 가르고, 내 생각너머 도시의 풍경과 승객들을 내가 보는 영화의 배경화면으로 깔아준다. 사이사이 열리고 닫히는 버스문으로는 도시의 삶이 들락거린다.  


순간, 남겨진 나는 떠나고 싶었다. 떠나는 이는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떠나는 이에게는 긴장과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날 떠나는 자가 되기로 했다. 빈 공간을 덩그러니 빈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긴장과 설렘을 선택했다. 


버스를 타고 이태원으로 돌아오는 길목 가운데, 서울역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정장바지에 하얀 셔츠, 노트북이 들어있는 미팅 용 가방과 까만 장우산, 그리고 힐을 신은 차림 그대로. 버스에서 내려 또각거리며 역사로 향했다. 


이런 날이 있다. 순탄한 하루였지만 순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하루. 나는 이 날 격려가 필요했다. 잘 살고 있다는 지지가 필요했다. 내 가슴 안의 빈 공간에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떠나야겠다. 가족의 격려가 친구의 지지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언니집에 도착해 이야기 나누다 다음날 친구와 만났다. 나에게 힘을 실어 달라고 말했다.

비 내리는 수요일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카페촌에서 친구와 얼굴을 마주하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한 후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역에서 다시 이태원으로…

나는 격려와 지지를 주는 서울역이 근처에 있어 기쁘다. 이태원에서 사는 장점 중 하나이다.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역사가 가깝다.

작가의 이전글 보광동 스타벅스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