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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Sep 11. 2023

Aeil ! 과의 만남

인연(인연 因緣, 因 인할 인  緣 인연 연)이란 말이 있다.

因 인할 인: 말미암다.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요즘 들어 특히 ‘우연은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6월, 어느 날 멀리 제주도에서 처음 만난 분에게 꽃을 선물 받았다. 열 가지 종류의 꽃을 보내 주었다고 하는데, 정작 꽃을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나의 엄마이다.


세 달 뒤 엄마 집에 핀 꽃을 언니가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꽃모종이 튼튼히 자라 꽃을 피운 모습이었다. 서울에 있는 나는 꽃을 키울 장소가 없어 엄마에게 보낸 것인데, 그 꽃들이 잘 자라고 있었나 보다. 선명한 초록잎에 빨간 꽃. 이름이 애기별꽃이라고 한다. 또 다른 꽃은 보라 아게라텀이라는 꽃이다. 꽃씨를 주신 분은 제주도에서 꽤 유명한 펜션을 운영하시는 분이다. 우연히 펜션에 딸려있는 레스토랑에 갔다 꽃이 가득한 정원을 보았다. 


몇 백 평쯤은 쉬이 되어 보이는 곳에 펜션과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주위에 정원을 가꾸며 식물을 돌보고 있었다. 정원에 핀 꽃은 알록달록한 수국 외에는 모두 처음 보는 꽃이었다. 크고 화려한 수국 옆에 작고 연약한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뭉게뭉게 피어있고 사이로 조그만 조약돌을 깔아 오솔길을 만들어 놓았다. 마치 파스텔색 순정만화 표지가 현실에서 재현된 느낌이랄까. 빨강머리 앤 이라면 아마 이 꽃 숲으로 들어가 행복에 겨워 뱅글뱅글 돌지 않았을까. 예쁜 꽃들이 가득한 꽃밭을 보며 나는 내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마침 정원을 가꾸던 사장님이 다가와 나에게 꽃을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엄마집에 제주도 펜션 사장님의 꽃이 자라게 되었다. 활짝 핀 꽃 사진을 제주도에 보내주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어쩌다 제주도에 갔다가 생긴 일이다.


우리는 늘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경우도 있으나 우연한 만남도 있다. 대부분 후자의 경우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 들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목적이 있는 만남이든, 우연한 만남이든 모두 ‘인연’이라는 한자의 의미처럼 무엇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최근 만난 집 근처 식당 사람들이 그렇다. 8월의 마지막날. 저녁에 집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두 시간 있을 조용한 카페나 식당을 찾아다녔다. 저녁 시간 이면 집 근처 이태원 일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특히 이젠 목요일부터 카페, 레스토랑, 바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곳을 찾아 동네를 한 바퀴 돌고도 마땅치 않았던 찰나. 한 식당을 발견했다. 유리문을 통해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식당 내부 끝에 한 무리의 손님들과 열린 주방에 두 사람 총 다섯 명이 있을 뿐 조용했다. 인테리어도 편안하고 외부에 걸려있는 메뉴도 맘에 들었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의 조합이었다. 고등어회와 구운 파프리카 소스, 소고기 타르타르에 치즈, 베트남 춘권에 치즈, 양고기 구이 등. 메뉴를 보니 주방장이 궁금해지고 했다. 가격도 적당해서 들어갔다.


예상대로 조용한 분위기에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가운데에 놓여있는 어항에 금붕어가 편안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생명체는 어딜 가나 힐링을 주는 힘이 있나 보다. 금붕어가 어항에 갇혀있는 건 좀 안타깝긴 하지만 보고 있자니 마음이 금세 차분해졌다. ‘아! 생각 정리하기에 딱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주인이 바에 앉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한다. ‘음… 바에 앉으면 대화를 하게 될 텐데…, 그럼 뭘 혼자 쓰기도 그렇고… 생각정리는 잘 안 되겠는데…’ 하고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바에 앉았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주인은 표정과 목소리에서 착함과 약간의 강단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가 요리사였다. 아직 어려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센스 있게 음식을 조합한 걸 보니 아마도 음식맛을 잘 아는 사람인 듯했다. 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니 식당 인테리어와 메뉴, 음악선곡까지 모두 이 청년 주인의 솜씨였다. 함께 있는 다른 청년 친구는 빵과 디저트를 담당하는 데 나는 선한 이미지가 두 사람이 닮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만났는데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주도에서 만난 펜션 사장님도 집 근처에서 만난 식당 주인도.

Aeil(앨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라고 한다. 오픈한 지 2주가 채 안되었는데, 평생을 할 생각으로 식당을 꾸몄다고 한다.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정직하게 초심을 잃지 않고 좋은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손님들께 제공하고 싶다는 그의 다짐에 괜히 겸허해지기까지 했다. 


음식과 와인, 모든 것이 완벽했던 8월의 마지막날. 초면인 그 집의 하얀 벽에 불어문구를 적는 영광까지 가졌다. 적은 문구를 주인에게 해석해 주는 데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인 듯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날 나의 생각 정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우연한 건 없는 만남에 대한 확신과 함께, 나의 삶도 필연적인 이 벽과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계기가 될 듯한 확신이 든다.


Chaque jour, pense au réveil, aujourd'hui, j'ai la chance d'être en vie, j'ai une vie humaine précieuse, je ne vais pas la gaspiller.

-Dalaï Lama-


매일 아침 깨어남(꿈)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오늘 살아있어서 행운이고, 나는 이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절대로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약간의 의역이 들어갔습니다).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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