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수의 생활을 시작하다.
월급이 제때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어릴 적 아버지가 수입이 적자인 날도 직원에게 월급 주기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고 월급쟁이가 최고다 생각했다. 목표했던 월급 나오는 직장인으로 12년 차다. 다만 승진에서 물을 여러 번 먹은 경험으로 가치관이 변화했다. 마지막 도전으로 안되면 박차고 나가야겠다는 다짐으로 칼날을 갈았던 올해다. 팀 내 돌아가며 확진자 발생했음에도 재택을 승인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집, 회사만 오가며 나를 지켜왔다. 상급자가 부재로 회의를 대신 참석해야 할 때는 당연시했지만 밀린 업무만 나를 기다릴 뿐이었다. 온몸으로 막아냈지만 특혜라고 1도 받지 못한 채 되려 평가에서 마이너스만 채워갔다.
타인에게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거절을 했어야 함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반기 평가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남 좋은 일만 해준 거였구나라는 걸 여실히 수치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유 모를 우측 복통을 시작으로 이석증의 빈번한 재발, 불면증, 위궤양 온몸으로 막아내는 날들이 계속 됐다. 그럼에도 나약하다며 내게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업무 중 병원치료받고 복귀하는 가 하면 결혼식 전날에도 야근하며 업무를 했다. 신혼여행 중 업무연락으로 회사를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는 처지였다. 예견된 일이 벌어졌다. 저녁에 별 이유 없이 터져버린 눈물은 30분이 넘게 지속되었다. 서럽다는 감정을 억눌러왔던 것들이 터진 듯했다. 그 정도 쉼 없이 달려왔으면 쉬어도 된다는 남편의 말에 그제야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퇴사를 작년부터 권해왔다. 매번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왔다.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미련하고 바보 같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회사에서 상을 받아 해외연수도 가고 사보에 실려 부모님께 호캉스를 시켜 드렸던 나였던 나였으니까. 야근과 주말 출근은 일상이었기에 작은 소음조차 나지 않았다. 이 기록은 회사를 다니는 동안만 유효하다. 퇴사를 한다면 이 모든 건 다 사라지는 사실에 두려웠다. 더 큰 두려움인 건강이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전생에 나라를 팔았던 게 틀림없다.
병가를 신청하고 되돌아온 답은 승진이 어려울 수 있는데 괜찮냐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퇴사를 한 사람 대다수 동일한 업을 하고 있다. 동갑이었던 유일한 친구는 사표를 던지고 2년 만에 결국 돌고 돌아 같은 업을 하는 프로 이직러가 되었다.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을 거라 포부를 내비쳤던 그였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연봉을 생각하면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며 버텨내라고 조언했다. 경력 살려 승진하는 게 최고라며 퇴사를 극구 말렸다. 다른 지인은 육아휴직도 낼 수 있다며 복지혜택 이용해보는 건 어떻냐는 조언을 했다. 결론은 원래 일이 힘든 거라며 버텨라였다. 걱정 어린 조언이었을 테지만 가시가 되어 박혔다. 일을 하다 모니터를 보는데 눈물이 흐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훔치고 일했고, 이유가 어찌 됐든 내 잘못이 되는 게 일상이었다. 승진이고 뭐고 나부터 살고 보자라는 마음으로 병가를 승인받았다.
다쳤더라면 ..
진단서 받기 위해 내원한 병원에서는 검사나 치료받은 기록이 없어서인지 일주일이면 회복될 거라며 나일롱 환자처럼 바라봤다. 환자분이 힘들다고 하시니 한 달까지는 적어드리죠라며 말이다. 외상이었더라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텐데 mri 촬영하고 원인을 찾기 위해 검사를 하며 재활치료도 받다 한방치료도 받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수십 명의 환자를 진찰하려니 얼마나 힘들까라며 나를 다독여본다.
남편이 재밌다며 보여준 우주에 무수히 많은 행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영상을 보고 멍해졌다. 나는 먼지 한 톨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퇴사를 한다고 한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아. 넌 잘 해낼 사람이야. 회사를 위해 더 이상 살지 마. 회사는 너를 부속품으로 생각할 뿐이야. 23년도는 네가 원하는 일을 하며 건강한 해이길 진심으로 응원할게.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전한다.
내년을 앞두고 자신을 위한 칭찬 하나를 작성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