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병동 간호사> 장기근속 10년 기념 리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내 직업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부로 간호사 인생 만 10년을 채웠다. 첫 직장에서 간호사로서 10년 장기근속을 달성하며 느꼈던 점을 써보려고 한다.
10년 정도 간호사를 하면 꿈이 간호사인 것 같지만, 단 한 번도 간호사를 꿈꾼 적 없었다. 수영할 땐 수영선수가 꿈이었고, 피아노 칠 땐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다. 꿈이 수시로 바뀌고, 꿈도 많았는데 그 많던 꿈에서 간호사는 없었다. 그러던 내가 우연히 현실에 순응적으로 수능 점수에 맞춰 간호학과에 입학한 뒤로, 내가 꿈꾸던 미래와는 다른 일들이 펼쳐졌다.
내가 간호사로서 처음 발령받은 병동은 후두암, 두경부암, 갑상선암, 방광암, 신장암, 전립선암 수술 환자를 돌보는 곳이었다. 후두 전체를 드러내는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성대도 함께 잃었기 때문에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고, 방광 전체를 드러낸 환자들은 2-4시간마다 배 밖으로 나온 요루 주머니를 통해 소변을 비워야 했다. 20대-30대면 건강에 자만할 수도 있는 나이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매일 바라보는 것도 쉽진 않았다. 우리에게 당연한 장기 하나가 없다는 것은 엄청난 불편과 상실이었다.
이후 소화기내과 병동으로 로테이션되었을 때는 주로 간암, 췌장암, 위-대장암, 담도계암 환자들을 간호했는데 하루하루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고, 간성 혼수로 인하여 갑자기 의식이 소실되며, 복수가 가득 차올라 호흡도 대화도 힘겨워하는 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봐야 했다. 죽음을 자주 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태움이라는 것을 겪을 때도, 누군가가 사실이 아닌 말을 지어내며 뒷담화를 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도, 넘쳐나는 일로 오버타임을 해가면서 일했지만 빠트린 부분으로 크게 혼날 때도, 환자나 보호자가 이유 없는 화풀이를 나에게 할 때도. 친밀하게 라포(rapport)를 쌓아온 환자들이 임종하실 때도 나는 몰래 울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이런 환경에 무뎌진 내 모습을 목격했을 때였다.
솔직히 간호사 직업을 추천하진 않는다. 특히나 암병동 간호사는 더더욱 추천하지 않는다. 자칫하면 세상을 회의적으로만 바라 볼 수도 있다. 사소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우리의 일은 오래 할 수 없게 되고, 감정 이입을 잘하는 나 같은 성격은 반복해서 상처만 받을 뿐이다. 죽음을 반복해서 바라보다 보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허무주의의 끝은 감정의 부재였다. 임종하는 환자들 앞에서 슬퍼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나를 보며 자책도 하고, 현타도 왔었다.
이 일을 하면서 좋고 행복하고 건강한 것보다는 아프고, 상실하는 것 위주로 보며 살아온 게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나는 반복해서 삶의 허무주의에 빠졌으며, 허무주의에 빠질 때마다 스스로를 힘겹게 겨우 겨우 건져냈다. 이런 환경에서 버티려면,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분 1초를 결코 헛되게 쓸 수가 없었고,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극심한 통증에 진통제라도 먹는 심정으로, 약간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퇴근 후 하고 싶은 것들로 채워 넣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퇴근 후 피곤하지만 독서 모임을 운영하는 이유도, 내가 산을 타는 이유도, 내가 와인 한 잔을 마셔도 맛있게 제대로 마시려고 하는 이유도, 이런 글과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도 누군가는 내가 쓴 글을 통해, 독서 모임을 통해, 취미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느끼며 살았으면 해서 이다.
한편, 암환자들을 간호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건강할 때 하고 싶은 것 하며 살걸.'이었다. 하고 싶었던 것, 먹고 싶었던 것, 보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다음’으로 미뤘던 점이 가장 후회된다고 하셨다. 즉,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현재를 희생하며 미래의 행복에 투자한다. 만기가 언제인지 정해지지 않은 적금처럼, 종신 보험처럼 말이다.
삶의 마지막 시기는 알 수 없기에, 행복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행복할 순 없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의 꿈은 많고 원대했었다. 무언가를 이루고, 대단한 사람이 되고, 스펙을 쌓아가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내 꿈이었다. 그런데 암병동에서 일을 하다 보니 좀 더 본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게 되었고,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지금 살아 있는 현재를 사는 것, 소중한 사람들을 한껏 사랑하며 사는 것, 나에게 주어진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내 삶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그렇게 사랑하진 않았지만, 내가 가진 10년의 암병동 간호사의 경험은 살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 것, 내가 이것을 깨닫기 위해 간호사가 되었을까.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간호사가 되었을까. 나는 10년 동안 암병동에서 간호하며 아마도 삶을 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