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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13. 2020

빨리빨리 천천히

  시커먼 남자아이들 서너 명이 교무실에 볼일이 있는지 저들끼리 쑥덕거리며 내 앞을 지나간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지만 그저 생각일 뿐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교무실을 가운데 두고 남자아이들을 모아놓은 1, 2반과 여자아이들을 모아놓은 3, 4반이 양쪽에 있었다. 나무바닥으로 된 기다란 복도를 따라 교무실을 가로지를 수 있는 것은 짐짓 은근한 시선뿐이었다. 


  어린 티를 벗은 지 겨우 몇 달이지만 눈빛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른 곳도 아닌 교무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든 채로 벌써 몇십 분째 남학생들 앞에서 얼굴을 팔고 있다.


  친구들과 놀다가 겨우 유리창 한 장 깨먹은 게 무슨 큰 죄라고 이렇게나 창피를 주는지. 어서 빨리 선생님이 명한 한 시간이 지나야 이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벌을 끝내련만, 시간은 어찌나 더딘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창피한 건 창피한대로 두자 쳐도 치켜든 팔이 떨어져나갈 것만 같아서 두 팔을 머리통에 슬쩍 얹어 통증을 나누어보려고도 했지만 똑바로 들어, 하는 선생님의 꾸지람만 교무실 창문 너머로 한 번 더 날아든다. 


  그런데 아무래도 교무실 앞에 서있는 저 커다란 괘종시계는 멈춘 것 같다. 밥을 못 먹었는지 일하는 태도가 영 불성실하다. 태엽을 감아줘야 덩칫값을 할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한다. 시간이 과연 흐르긴 할까. 먼 훗날 이 시간을 생각하며 그땐 그랬지, 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긴 올까. 


  시간아 흘러라. 제발, 빨리빨리.


  고속버스를 기다린다. 내 생애 처음 받은 월급으로 엄마가 입을 빨간 내복과 갖가지 선물을 사서 시골집에 내려갈 참이다. 엄마가 그리도 반대하던 그림을 그렸고, 충무로의 작은 디자인회사에 취직해서 받은 월급이라야 겨우 삼십만 원 남짓이지만, 내 머릿속으로는 집도 몇 채나 사고 옷도 수십 벌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 중에서 눈곱만큼 떼어내 저녁을 대신할 요량으로 햄버거와 콜라를 사먹었다. 얼마지 않아 버스의 문이 열리고 막내딸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어서 보여주고 싶어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지나치게 들뜬 나머지 기사아저씨의 표 검사가 이루어지고 부르릉 시동을 걸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언가 하나 행하지 않았음을.


  식은땀이 흐른다. 욕심껏 채운 햄버거가 문제였는지 벌써 한 시간도 넘게 항문은 열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하고, 뱃속에 손을 쑤욱 집어넣어 휘젓는 것처럼 속은 울렁울렁, 다리는 베베 꼬인다.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냅다 달려 이제 도착하기까지 삼십 분 정도를 남겨놓은 상태다. 아무리 힘을 주고 있어도 거침없이 뽕뽕 새어나오는 방귀냄새를 맡은 건 아닌지,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닌지,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서 다리를 베베 꼬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들키는 건 아닌지. 가장 뒷좌석에 앉은 나는 저어기 앞에 앉은 잘생긴 총각이 한 번씩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코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걱정이 되었다. 또 시간이 멈추었다. 시간이 멈추는 바람에 차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같은데 내 배는, 내 항문은 더 치열하게 전쟁을 시작한다. 


  이제는 한계를 넘어섰다. 잘생긴 총각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냄새나는 그곳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다. 이 아찔한 상황을 잊고 싶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아마도 엄마가 날 보면 기특하다며 꼬옥 안아주겠지. 우리 막내딸이 벌써 커서 이렇게 곱디고운 빨간 내복도 사 왔노라며 자랑하느라 마주치는 사람마다 허릿단을 몇 번이나 뒤집어 보이겠지. 창피한 것도 모르고 온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웃음소리 내며 다니겠지. 엄마를 만나 그렇게 회포를 풀고 나면 다음은……, 망했다. 다음을 생각하니 잠시 잠잠했던 그곳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문간 옆 그곳, 변소로 향하는 내가 그려진다. 바지를 내리고 쪼그리고 앉은 모양새라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쏜가.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쏜가. 그러나 다 부질없다.


  버스 맨 앞에 빨강색으로 숫자만 반짝이는 전자시계가 보인다. 까아아암빡. 그게 아니라고, 더 서둘러 깜빡이라고, 깜빡깜빡해야 전자시계인 거라고, 너처럼 느릿느릿 깜빡거렸다간 얼마 안 가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 같아선 저 느림보시계를 떼어다가 발로 쾅쾅 짓이겨주고 싶다. 


  시간아 흘러라. 제발, 빨리빨리.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스무 해, 서른 해도 더 넘은 일이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한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도 교무실을 벗어날 수 있었고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통보 없이 깨진 유리창 값만 물어주며 끝이 났다. 버스 안에서도 끝까지 잘 참아내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도착한 터미널 화장실에서 푸짐하게 일도 마쳤던 기억이다. 끔찍한 생각이지만 그러한 시간이 다시 반복된대도 나는 아마 또다시 외칠 것이다, 빨리빨리. 


  하지만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면 빨리빨리가 아닌 천천히를 외치고 싶은 때도 있다.


  결혼을 하고 작은 셋집에 살 때 아기가 생겼다. 아직 부르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는 내 모습을 보고는 주인할머니가 빙긋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배 속에 있을 때가 제일 좋을 때여.”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보았을 때는,  


  “누워있을 때가 제일 좋을 때여.”


  아기가 기기 시작하자, 


  “기어댕길 때가 제일 좋을 때여.”


  그리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종전과 다른 말을 했다.


  “인쟈, 좋은 날 다 간 거여. 다 큰 줄 알고 이리저리 지 혼자 댕김서 어지간히 말썽 부릴 거거든.”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는 무거운 배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얼른 낳았으면 좋을 것만 같고, 옹알거리며 누워 있을 때는 아장아장 걷는 아기 손을 잡고 공원에 놀러 가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빨리 자라라고, 빨리빨리 크라고 아이와 눈을 맞출 때마다 주문처럼 외웠었다. 그때는 그때가 좋은 때라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금 아기의 눈을 지그시 맞추고는 빨리빨리 대신 천천히라 고쳐 말하고 싶다. 


  굳이 빨리빨리라 외치지 않아도 비호처럼 빠른 시간이 내 옆을 스쳐만, 그냥 스쳐만 가는 것 같은 지금. 그래서 이제 좋은 날 다 갔다고 후회로 울기 전에, 큰 소리에 놀라 시간이라는 것이 훅하고 지나갈까 조바심치며 자그마하게 말해본다. 천천히, 천천히.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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