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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13. 2020

존대의 이유

  고객님. 단말기 설치 끝냈습니다. 그런데 고객님. 이거, 휴대용단말기는 써보신 적 있으세요? 아, 아직 못써보셨구나.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자, 일단 여기 좌측 상단에 전원버튼 보이시죠? 이렇게 꾸욱 누르셔서 켜시면 되세요. 그리고 카드를 IC칩이 안쪽으로 가시게끔 삽입시켜 주세요. 그럼 판매금액 입력이라고 뜨시죠? 만약에 오천 원이시다, 그러시면 숫자버튼으로 5와 0 세 개를 누르세요. 그리고 입력버튼 누르시면 되세요.


  아직 끝나신 게 아니세요. 바로 이어서 할부 개월 수가 뜨실 거세요. 이 때 또 할부 개월 수를 꾸욱 눌러주시고 입력, 그럼 끝나신 거세요. 따로 적어드릴까요? 아,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 금세 다 외우시네요. 똑똑하신 우리 고객님, 이제 진짜로 다 끝나셨고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시면 저에게 전화주세요. 아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하나만 드릴게요. 제가 가고 나면 친절여부에 관한 설문조사 전화가 본사에서 오실 거세요. 그 때 별 다섯 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고민에 빠졌다. 아첨과 겸양, 그 중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친절의 정도를 넘어서서 거의 떠받들다시피 나를 대하고 있었다. 개가 꼬리를 돌돌 말아 가랑이 사이에 끼운 채로 낑낑거리는 모습이었다. 겨우 단말기 하나 설치했을 뿐인데 그 짧은 시간동안 수만 번의 존댓말과 수천 번의 알랑거림을 들은 것만 같았다. 과연 이것을 친절하다고 해야 할까. 친절하다 못해 아예 단말기마저도 왕으로 대우 받았으니 다섯 개도 모자라다며 열 개 스무 개를 줘야 한다고 해야 할까. 내내 존댓말을 들었지만 오히려 반말로 무시당한 듯 기분이 착잡해졌다.


  친구가 식자재가게를 개업할 때 카드단말기를 설치하러 왔던 기사가 쏟아냈던 말이다. 매번 ‘거예요’가 아닌 ‘거세요’로 끝내는 걸 보며 도대체 무슨 교육을 어떻게 받은 것일까 생각했다. 존칭도 아닌 극존칭을 써야만 별 다섯 개를 얻을 수 있다고 했을까. 그의 말은 주체도 정확하지 않은 모든 것에 존칭을 써댔다. 사물에게까지 존대하는 것이 자꾸만 귀에 거슬려 한 번 짚고 넘어갈까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나조차도 제대로 쓰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판에 충고랍시고 아무 말이나 건넬 수는 없었다. 


  어릴 때 학교에서 존댓말 낮춤말을 배우긴 했지만, 존댓말이 내 입에서 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언니오빠들에게도 ‘밥 먹었어’가 아닌 ‘밥 먹었냐’고 말할 정도로 건방졌다. 콜록콜록 기침을 달고 사는데도 가난한 살림 탓에 병원 한 번 데려가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였는지 좋은 것 맛난 것은 죄다 내 차지였기에, 나는 언제까지나 그래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초등학교 삼학년 때쯤에 그런 나를 지켜만 보던 작은오빠가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하루는 나를 앉혀놓고 일장연설에 들어갔다. 


  명주야, 왜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하고 다녀? 내가 너보다 오빠야. 두 살이나 많은. 그런데 오빠뿐만 아니라 너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다른 사람들한테도 먹었냐, 해라, 그러면 사람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 싸가지도 없다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욕해. 그래도 좋아? 엄마가 이렇게 고생고생하면서 우리를 키워주시는데 그 자식들이 욕먹고 다니는 걸 알면 얼마나 속상하시겠어. 더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이 오빠도 엄청 기분이 나빠져. 그러니 너한테 되돌아가는 말도 당연히 말투가 사나워졌겠지?


  그 날부터 나는 밥상에 구운 갈치 한 토막이 올라와도 먼저 젓가락을 얹을 수가 없었다. 상 밑으로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엄마가 먼저 맛보시고 나면, 라고 말하며 눈을 꿈먹거려 눈치를 주는 오빠 때문이었다. 그리고 학교를 갈 때나 마치고 돌아올 때, 행여 아무도 없는 빈집이라 할지라도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라고 크게 외쳐야만 했다. 엄마가 아닌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갔다 올게.’가 아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처음엔 멋쩍기도 하고 입에 붙지 않아 어색했지만 오빠의 사나운 눈초리에 그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되어야만 했다.


  말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기도 하였다. 반말을 찍찍 하고 다닐 때는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더니, 존대를 시작하고 나니 매사가 조심스러워졌다. 단순히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존댓말을 배웠고, 싸가지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을 둔 어미를 만들지 않기 위해 존댓말을 썼다. 하지만 존중을 담은 존댓말 한 마디에 얼마나 사람이 조심스러워지는지 알게 되었고, 배려를 담은 존댓말 한 마디에 얼마나 사람이 성숙해지는지 알게 되었다.


  한 커피전문점에서 점원이 고객님, 커피 나오셨습니다, 했고 커피를 받아든 손님이 왜 커피가 나온 게 아니라 나오신 거냐고 물으니, 커피 한 잔 값이 아르바이트 하는 제 시급 보다 높으니 받들어 모셔야지요, 하더라는 말이 있다. 가히 존대의 이유가 짐작되는 말이다.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놓인 그 무엇에게는, 비록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닐지라도 처절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을 높이는 것이다. 


  뽀얀 얼굴로 말갛게 웃으며 온갖 것에 존대를 하던 그를 떠올려본다. 그도 카드단말기 가격이 자신의 월급보다 비싸서 그렇게나 단말기에게 말을 높였던 것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갑과 을로 나뉜 사회에서 스스로가 을이라 여기고 회사가 원하는 대로 고객이 원하는 대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던 것일까. 아니다. 과유불급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조금 지나치긴 했어도 고객인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그에게 낯빛을 굳혔던 내가 되레 미안해졌다.


  존대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귀히 대하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격식에 맞는 존댓말에는 배려와 겸양까지 배어나온다. 그러나 갑이 아닌 을이라서 존대를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누구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건네는 말에다가 적절히 존대를 덧입힌다면 말로써 마음이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에 대한 예우를 했을 뿐인데도 자신의 품위까지 덩달아 올라가게 된다. 그러니 이것은 언제 어느 때라도 꼭 지켜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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