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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명주 Oct 13. 2020

명태

  명태는 호칭이 많다. 채 자라지 못한 어린 새끼 또는 그것을 말렸을 때는 노가리, 얼린 것은 동태, 얼리지 않은 것은 생태, 얼린 것을 가을에 통으로 말린 것은 북어, 산란기에 잡아 겨울동안 낮에는 녹고 밤에는 얼기를 반복하면서 말린 것은 황태라 부른다. 석수어라고도 불리는 조기를 말리면 굴비라 부르고, 고등어에 소금으로 간을 세게 해서 절이면 자반이라 부르듯, 지역의 사투리까지 더해져 다른 호칭을 가지게 된 생선이 꽤 있다. 하지만 명태처럼 나이에 따라, 처리방법에 따라 호칭이 다양해지는 생선도 드물다.


  나도 살아오는 동안 다른 호칭이 계속 생겨났다. 딸, 아내, 며느리, 엄마. 오래지 않아 할머니라는 호칭까지 얻으면 한 여자로 평범하게 살아온 내가 집안에서 받을 수 있는 호칭은 거의 갖게 되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명태가 나 같기도 하고 내가 명태 같기도 하다. 변화가 그러하다. 이십대는 노가리처럼 쫄깃했고, 삼십대는 북어처럼 세상에 부딪혀서 단단해졌으며, 사십대가 되고나니 세월을 먹어 동탯살처럼 야들야들해지는 듯하다. 

  그런데 노가리, 북어, 동태 중 과연 어느 것을 진짜배기 명태라고 정해 불러야 할까.


  부스슥.


  좌쌈우주. 왼손에는 안주가 될 쌈을 들고 오른손에는 술을 들어야 한다지만, 쌈 대신 잘게 찢은 노가리 한 점을 고추장에 찍어 손에 들고는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먼저 들이켠 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는다. 그러자면 쌉싸래한 불맛이 먼저 느껴지고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육질은 몇 모금의 맥주를 더 불러들인다. 


  젊은 날 친구들을 만나면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다른 무엇보다 딱 우리만큼 자란 명태의 새끼인 노가리 안주를 놓고 시작한다. 한꺼번에 많은 수의 알을 낳아 말이 많은 사람을 빗대어 노가리를 푼다고 하는데, 나와 친구들은 반가움과 즐거움에 노가리를 풀기도 했고 먹기도 했다. 그저 엄마의 딸이었고 한 회사의 말단 직원일 뿐이었던 그때는 걱정이래야 회사에서 어쩌다 한 번씩 부딪히는 상사와의 관계나 늦은 귀가를 타박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입으로 풀어내는 노가리가 끝이 없었고, 입으로 들어가는 노가리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탕탕탕.


  통북어 한 마리가 가루가 될 지경이다. 서른을 넘어서자 그리 곱기만 하던 남편이 미워 보이는 때가 잦아졌다. 그래서 북어에 화풀이를 했다. 예전에야 부엌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다듬잇돌에 얹힌 북어를 다듬잇방망이로 힘껏 내리쳤을 테지만 요즘은 그럴 수 없으니 도마 위에 놓고 작은 절굿공이로 잔뜩 오른 화는 풀되, 아래층에 소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내려친다. 그러자면 죄 없는 북어는 밤새 술을 마시고 새벽에야 들어오는 밉살스러운 남편으로 인해 내리치는 방망이질에 힘없이 자잘하게 찢긴다. 


  포르르 끓어오르는 북엇국냄비처럼 여전히 속에서도 화가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그렇다고 북엇국에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쓰린 속을 어서 달래주어야지 하는 안쓰러움도 있고, 무슨 고민이 있어 저리 술을 마셨을까 하며 걱정하는 마음도 담겨있다. 그렇기에 북엇국을 그릇째 들고 마시며 어― 속이 다 풀리네, 지나가듯 한 마디 툭 뱉는 남편을 가로로 길어진 눈을 하고 바라보면서도 허옇게 뜬 남편의 안색을 살피곤 했다.


  후루룩.


  국물을 한 입 뜨고 나면 헛헛했던 속이 꽈악 들어차는 느낌이다. 마흔 줄에 들어섰을 때부터는 맥주보다는 소주를 더 찾게 된다. 취중진담, 가끔은 술의 힘을 빌려야만 털어낼 수 있는 걱정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친구를 찾았고 또 소주를 찾았다. 소주 안주로는 국물이 최고다. 그래서 이름 끝에 탕이 붙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그것으로 정한다. 


  그 중 최고는 동태탕. 나박나박 썰린 무가 동태의 맛을 깊이 우러나게 해주어 소주 한 잔 크― 들이켜고 나면 저절로 숟가락이 냄비를 향한다. 두부만큼이나 물컹해진 무와 보들보들한 동태의 살점을 씹을 것도 없이 매콤한 국물과 함께 꿀꺽 삼키고는 다시 잔을 든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전보다 더 밉살스러워진 남편 흉에, 커가면서 가끔씩 속 썩이는 아이에 대한 속상함을 술술 풀어내게 된다. 그즈음이 되면 차갑게 식어버린 동태탕은 다시 불 위로 올라가 따뜻하게 데워지고, 동탯살은 언제 얼었던 적이 있었냐는 듯 보드라워져서 짓무른 속을 달래주었다. 


  지금껏 명태는 매번 다른 호칭으로 다가왔다. 내가 찾는 이유와 상황에 따라 회사의 상사를 씹듯 잘근잘근 씹을 수 있는 안줏거리인 노가리로, 애먼 화풀이 대상인 북어로, 헛헛한 속을 따뜻하게 채워준 탕의 동태로 변하며 호칭을 바꿔갔다. 그러한 명태가 여러 호칭이 아닌 그저 명태이고만 싶을 때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가끔 아내나 엄마가 아닌 그저 나이고픈 것처럼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하나의 이름인 명태만을 오래토록 갖고 싶지 않았을까. 노가리라고 해서, 동태나 북어라고 해서 명태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저 명태라는 하나의 호칭만을 갖고 싶을 때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나무가 아무리 갈잎을 만들어내도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고 말하듯 명태도 나이와 처리방법에 따라 호칭만 바꿔갔을 뿐 내내 명태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누군가가 나를 내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지언정 나는 여전히 나라는 것도 명태를 보며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내도 누군가의 엄마도 모두 나라는 것을, 굳이 겉모습을 벗어던지려 하지 않아도 그 안에 모두 내가 있음을 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왠지 조명 밖으로 밀려 흐릿한 배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럴 때면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는 동태탕을 앞에 놓고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다정하게 명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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