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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김이 Oct 22. 2022

얼렁뚱땅 몽생미셸

파리에서 셋째 날


여행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일정을 짤 때 나 나름의 기준이 있다.

바로 하루를 바쁘게 활동했으면 하루하고 반 정도는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월요일에 약속이 있다면 다음 약속은 수요일 녁 이후 잡는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기력을 충전하는 내향인이기도 하고, 약속  최적의 컨디션으로 텐션을 높이기 위해서다.


갑자기 나만의 계획 세우기에 대한 기준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디즈니랜드에서 불꽃놀이까지  바로 다음 , 고된 몽생미셸 투어를 하게  것은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어제 엄마가 취소하고 싶어 했던 몽생미셸 투어의 날이 밝았다.

엄밀히 말하면 투어 미팅 시간이 이른 새벽이라 밝은  아니었다.


몽생미셸 투어는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를 왕복하는, 난이도가 높은 투어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우리의 계획에서 몽생미셸 투어는 내일이었고, 오늘 파리의 미술관들을 다니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틀 , 투어사에서 연락이 왔다.

인원의 문제로 몽생미셸 투어는 오늘밖에 진행을 못한다는 것이다.


보통 투어의 최소인원은  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명이다.

항상 우리가 다수였고, 그래서 웬만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투어를 진행  있었다.


그런데 우리더러 날짜를 옮기라니!

선택지는  가지였다. 따르느냐, 취소하느냐.


하지만 몽생미셸은 디즈니랜드에 이어 동생이 기대하고 있는 일정  하나였고, 직전 새로운 투어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이었다.

그렇게 어쩔  없이 이런 극악의 스케줄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상대는  명인지 어디 한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미팅 장소로 향했다.

상대는 4명이었다. 우리가 졌다.


안개비에 어깨가 촉촉 해질 즈음, 자칭 파리에서 몽생미셸을 가장 많이 가봤다는 가이드가 9인승 벤과 함께 도착했다.



대부분의 몽생미셸 투어들은 몽생미셸이 해있는 ‘노르망디 지역의 도시들을 경유해서 간다.

몽생미셸 투어를 신청하는 이들은 몽생미셸의 야경을 기대한다.

야경 하나만을 위해 그 장거리를 왕복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투어들은 몽생미셸이 속해있는 ‘노르망디’ 지역의 도시들을 경유한다.


해가 늦게 지는 여름에는 ‘에트르타 ‘옹플뢰르,  도시를 거쳐 간다.

반면 해가 비교적 빨리 지는 겨울에는 ‘옹플뢰르 들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12월의 겨울인 만큼, 옹플뢰르와 몽생미셸만 가는 투어를 신청했다.

그러나 오늘은 에트르타, 옹플뢰르, 몽생미셸  곳을 가게 되었다.

이것도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쪽수로 밀려버린 이상, 다수의 결정 르는 수밖에 없다.



시작부터 작은 불만의 씨앗이 자라났다.




에트르타



에트르타는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이다.

 작은 마을은 소설 ‘목걸이’를 쓴 작가 모파상, ‘수련’을 남긴 화가 모네 등의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예술가들이 에트르타에서 가장 사랑했다고   있는 은, 바로 자연이 만들어   개의 코끼리 아치 절벽이다.

 코끼리 절벽은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에트르타는 석회질이 녹아 만들어진 에메랄드  바다로도 유명하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일 것이. 비바람만 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가이드는 에트르타에 대한 간단한 설명 후 투어벤으로 돌아갔고, 우리 일행은 에트르타 해변에 남겨졌다.



 비를 뚫고 에트르타의 전경과 세 개의 코끼리 아치 절벽   있다는 언덕에 올라갔다간, 엄마가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해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비바람에 고통받는 동생



하지만 우산을 계속해서 뒤집는 바람, 얼굴에 내리꽂는  제대로  산책   없었다.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0분가량 남았으니, 에트르타의 시내 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과거에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면, 지금의 에트르타는 유명한 해변 휴양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래서 그런지 해변 근처는 크기도  크고, 정갈한 느낌의 건물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도 매우 깨끗했고,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사람이 없었다.

애매하게 이른 이 시간에는, 카페들은 오픈 준비 중이었고, 종종 비바람을 뚫고 조깅하는 사람들만 지나갔다.


할 것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가이드에게 안내받은 공용화장실을 들렀다 투어벤으로 돌아왔다.



에트르타에 가 본 적이 있냐는 물음에는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지만, 에트르타에서 무엇을 했냐는 물음에는 답할 수 없을 어정쩡한 방문이 끝났다.


한 것은 없지만 비바람에 쳐버려, 우리는 옹플뢰르로 향하는 투어벤에서 곯아떨어졌다.


행복한 에트르타




옹플뢰르



한때 무역항으로 유명세를 얻었던 옹플뢰르는, 이제는 노르망디의 진주라고 리며 관광도시로 자리 잡았다.


옹플뢰르는 예전에도   적이 있다.

그때의 가이드가 옹플뢰르에서 먹어볼 갈레트, 홍합요리, 특산품인 우유 , 무료로 사용할  있는 화장실까지 살뜰하게 설명해준 기억이 남아있다.

그 설명들을 하나 둘 떠올리며, 이번에는 특산품인 우유 잼을 구입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항구의 일자로 이어진 건물들이 유명한 옹플뢰르 (2018)



하지만 모든 가이드들이 같은 설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쏟아지는  속에서 옹플뢰르를 둘러싼 역사 들었.

미국인들이  집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지,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어떻게 기여를 했는지 에 대해 말이다.


유익한 내용이다.

실제로 우리의 일행이었던 명의 학생들은 가이드의 설명에 추임새를 넣으며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만약  역시 이전의 가이드 투어에 대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혹은 날씨가 좋았더라면 재미있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옹플뢰르에 대한 애매한 지식을 가지고 었고, 속으로 저쪽 골목이 예쁜데, 저기 밀크캐러멜이 유명한데 등을 생각하며 투어를 쫓아갔다.

이미 지쳐버린 엄마와 동생비를 피해 가며 벅차게 투어를 따라가고 있었다.



배를 짓는 기술로 만들고 증축한 목조 성당, 생카트린 성당 (2018)



설명이 끝나고 다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가이드에게 식당을 추천해달라 다.

그리고 가이드는 옹플뢰르의 식당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가이드 말대로 항구 쪽의 아무 식당에 들어가려 했으나, 아직 오픈하지 않았다는 직원의 말에 되돌아 나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붙어야 한다.

나는 근방에서 핸드폰으로 식당을 찾아보고 있는 투어 일행에게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 식당에 갈지 정하셨어요?”


그렇게 우리는 얹혀가는 것에 성공했다.



일행들을 따라간 해산물 식당은  맛있고 친절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척척 메뉴를 추천받고, 주문을 하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편하던지!

우리도 비슷한 메뉴를 켰다.

점심은 이렇게 해결이다!


여행을 하다 보니 나도 점점 무계획형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작은 우산을 들고 고군분투하는 나




이제 옹플뢰르를 떠나 몽생미셸로 향할 때다.


몽생미셸로 향하는 투어벤에서 옹플뢰르 출신 음악가 ‘에릭 사티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에릭 사티 화가인 ‘수잔 발라동 사랑이야기를 위주로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설명이 끝나고, 가이드는 광고에도 자주 사용되었었다는 에릭 사티의 곡 ‘짐노페디 들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광고에 자주 사용되었다는 노래 치고는 생소한 멜로디였다.

아빠와 함께 매주 주말드라마를 챙겨보는 내가, 유튜브의 유료 서비스를 구독하지 않기 때문에 별의별 광고를 다 본 내가 모르는 광고라고?


의심과 함께 생소한 음악이 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이드가 에릭 사티의 다른 대표작을 려주었.

음악이 재생되고,  침대, BMW 등의 광고에서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짐노페디인 것이다!


그제야 가이드도 지금  노래가 짐노페디라며 정보를 정정했다.

하지만 아까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짐노페디가 님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렇게  마음속에 불신의 씨앗도 자라나기 시작했다.




몽생미셸



바다로 둘러싸인 수도원, 몽생미셸에 대한 여러 신비로 이야기들이 있다.


 번째는 몽생미셸이 대천사 미카엘의 명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708년, ‘오베르 주교 미카엘 대천사가 바다 위에 성당을 지으라 명령하는 꿈을 꾼다.

허무맹랑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무시했더니, 다시 꿈에 나타난 미카엘 대천사가 오베르 주교의 이마에 구멍을 냈다고 한다.

깨어나 보니 꿈속에서 구멍이 났던 이마에 실제로 자국이 생겨있었고, 그제야 오베르 주교는 바위산에 성당을 지었다.


이것이 몽생미셸이 된 것이다.



 번째는 몽생미셸이 종종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이 된다는 것이다.


몽생미셸의 조수간만의 차는 최대 15미터나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한 만조 때 몽생미셸을 보면,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신비로운 섬처럼 인다.



 번째는 몽생미셸은 병이 치료되는 수도원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몽생미셸에 가면 병이 치료된다고 하여, 많은 순례자들이 몽생미셸로 향했다고 한다.



 번째는 종교의 색이 담긴 전설이고,  번째는 자연이라는 과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번째는 무엇일까?



사실은 이러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떠나는 순례자들은  순례길을 대비해 자신의 전재산을 가지고 순례길에 오른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들이 강도를 만나 재산을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운이 좋게 강도를 만나지 않았거나 강도를 물리쳤더라도, 원래 마와 싸우던 순례자들이기 때문에 순례길 위에서 병들어 죽고 만다.


병마를 이겨내고 몽생미셸에 다다른 순례자들 앞에는 갯벌이 펼쳐져있다.

그리고  갯벌을 건너다 빠르게 밀려들어오는 바다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다.


 과정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몽생미셸에 도착해 병이 치료되었다는 구전을  것이다.

얼렁뚱땅 만들진 전설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거나, 병을 치료해주진 못해도 몽생미셸이 경이로운 건축물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투어의 종착지인 몽생미셸에 도착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지 에트르타, 옹플뢰르에서 내내 오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몽생미셸은 주차장에서 전용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관경에 사람들은 환호하며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 중에 동생도 있었다.


가이드는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다섯 시 반에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 같이 들어가서 설명해주시진 않나요?”


가이드는 수도원 입구에 가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있으니 필요하면 빌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예전에 참여했던 투어에서는 가이드가 통솔해서 수도원 내부까지 설명해주었는데!

비교를 하면  되는 것을 알지만, 계속 비교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이드가 내부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몽생미셸 수도원의 내부 투어는 현지인 가이드와 동행해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활동하고 있는 현지인 가이드가 없었기에 내부 투어가 어려웠던 것 아닐까 싶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설명도  듣고 떠밀려져, 앞서 생긴 불만과 불신의 싹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정말 얼렁뚱땅 몽생미셸 투어다.



이제 엄마와 동생의 가이드는 나다.


몽생미셸의 골목은 좁은 데다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드디어 수도원에 입성했다.


수도원 내부는 황량하다.

몽생미셸은 아름다운 외부와는 달리,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었으며, 원래도 묵언, 금식, 냉골  혹독한 수행을 하는 수도원이었기 때문이다.



첨탑 위의 미카엘 동상



그래서인지 수도원 자체보다는, 수도원 난간에 붙어있는 갈매기들에게  눈이 갔다.

어쩜 렇게 털이 윤기가 나고 하얀 것인지!


엄마는 화장실에 관심을 가졌다.

몽생미셸 수도원 내부에는 곳곳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허름하고 오래된 외부와는 달리 제법 깨끗했다.

입장료만큼 관리를 하나보다.


반면 반짝이는 , 예쁜 것을 좋아하는 동생은 수도원에서 딱히 관심을 가지는 것이 없었다.

빨리 조명이 들어온 몽생미셸을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수도원을 둘러보고, 출구의 기념품샵에서 기념품도 구매했다.



몽생미셸에서 유명한 것들이 몇 개 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수플레 오믈렛.

하지만  때는 역시 코로나로 인해 오믈렛 가게 무기한 휴무였, 점심에 먹은 것이 아직 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려오는 길에 가게들만 조금 둘러보았다.




그렇게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해는 지고 있었고, 뒤를 돌아보니 몽생미셸에도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생은 ‘!’  환호성을 질렀고, 나는 ‘?’  의아한 소리를 냈다.


2018년 12월의 몽생미셸 (좌), 2021년 12월의 몽생미셸 (우)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르다.

화질과 날씨가 아닌, 조명이 말이다.


2018년에 비해 2021년은 몽생미셸은 절반 정도가 어두웠다.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에게 조명이  켜진 것이 맞냐고 묻자, 가이드는  켜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추후에 알아보니, 코로나로 관광객이 적은 틈을  몽생미셸의 조명이 공사 이어서 전부 켜진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말 얼렁뚱땅이다.


그럼에도 몽생미셸의 야경을 처음  동생은 아주 만족했고, 나는  손은 핸드폰 라이트로 조명을 쏘고,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동생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엄마는 가만히 몽생미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모르는 것이 약이다.





오늘 몽생미셸 투어의 장점 바로 각자의 숙소 앞 내려준다는 것이다.


숙소에는 편하게 도착해 샤워를 하고 각자의 자리 쏟아지듯 누웠다.

마침 정각이라 에펠탑의 조명이 반짝였다.

 모습을 보고 엄마는 몽생미셸보다 에펠탑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늘 몽생미셸 투어가 어땠냐고 물었다.

엄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 조금 얼렁뚱땅이었잖아?”



무엇이든지 첫 번째는 멋 모르고 한다지만,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비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오늘의 투어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몽생미셸 투어가 처음이었다는 엄마마저 투어가 얼렁뚱땅이었다고  것을 보면  가지  하나인  같다.


 번째는 엄마가 이번 여행에서의  의 투어 경험들로 투어에 대한 기준과 관점이 생긴 것이다.

두 번째는 오늘의 투어가 정말 얼렁뚱땅이었던 것이다.


동생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세명   명이 그렇다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얼렁뚱땅이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렇게 파리의 초반이 정신없고, 얼렁뚱땅 끝나간다.

내일부터는 온전히 파리만을 느낄 수 있기를!


엄마 말에 따르면, 몽생미셸보다 더 아름다웠던 그 날의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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