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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Dec 28. 2019

애미야, 사과 좀 내와라

다르게 생각해보아요

보통 이런 제목에는 며느리가 시댁에서 당하는 서러움이나 불공평한 처사에 항의하는 또는 비판하는 글이 따라온다. 하지만 더러운 세상도 긍정적으로 살자는 나의 마음가짐으로 시어머니의 불편할 수 있는 저 한마디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우리 시어머니의 말투는 사실 저렇지 않다. 그냥 가끔 시댁에 방문하면 사과를 들고 오셔서는 "이거 오빠 좀 깎아줘", 아니면 "사과 몇 개만 내"라고 하신다. 신혼 때는 그래도 시댁에 잘 보이고 싶었는지, 미리 나서서 내가 "저 사과 깎는 거 연습했어요~~"라며 코 막힌 소리도 했지만, 어느 정도의 명령조가 섞인 말투를 접하면 의례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한 번은 누워서 "다음에 식구들 다 있는데서 또 사과 깎으라고 명하신다면 보란 듯이 남편을 불러서 깎으라고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 모두가 불편할 수도 있다. 티는 안 내고 별말 안 해도 그걸 보는 시누이나 갑자기 소심한 반항을 하는 며느리를 보는 시댁 식구들이나 나의 "오빠! 와서 사과 깎아먹어~!" 한마디에 겉으로는 내뱉지 않지만 시가식구들은 텔레파시로 순간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도, 자주 접하는 친정부모님에 의해 의도치 않게 이런 사소한 복수심이 깨질 때가 많다.

"손서방, 아 이거 CCTV가 며칠 전부터 잘 안되네, 한번 좀 봐줘"

"손서방! 이거 자꾸 에러 뜨는데, 왜 이러는지 한번 고쳐봐 봐"

"역시 손 가이버야! 뚝딱하면 다 고치네?"

기계 관련, 육체노동 관련, 테크닉 관련 등은 가끔은 설거지도 친정에서는 옆에 있는 나보다 남편을 더 의지한다. 독일에서 혼자 살아남으며 손수 변기쯤은 설치 및 수리도 가능하며 웬만한 가구는 취미로 자리배치를 마구 바꾸는 딸이 있어도 역시 남자가 더 믿음직스러운 부모님이다.


내 말투에서도 이미 차이는 발생되었다.

시가가 내게 시키는 것은 명령을 한다고 생각했고, 우리 부모님이 남편을 시키는 부분은 의지한다고 표현한다. 이미 내 마음에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존재했다.


남편이 그 상황에서 나에게 우리 부모님이 맡긴 노트북이나 폰을 바로 쥐어주면서 "에러 났데, 고쳐봐."라고 하면 정이 뚝 떨어질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시부모에게 성격대로 함부로 하지 않는 제일 큰 이유는 남편의 마음을 생각해서 인 것처럼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우리 부모님의 요구를 고분고분 들어준 남편 또한 그럴 것 같았다.

(별생각 없다고, 본인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긴 하다. 꼭 나만 문제 삼는 것처럼..)


물론 가정 by 가정, 케바케이기는 하나,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죽지 않아도 되는 요즘 세상에서 며느리가 굳이 마음에 응어리를 진 채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첫째,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는 처사에 대놓고 항의하는 방법

둘째, 내가 한발 물러서서 이해해주는 방법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잡기를 시전 하신 것인지, 아니면 내 가족이 된 사람을 본인의 품으로 빠르게 끌어당기려고 하셨는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요구들과 서운한 점이 많았다. 시어머니는 내 기준에서 지켜야 할 선을 수시로 넘나드셨는데 나는 그때마다 첫 번째 방법을 써먹었다. 대놓고 막 돼먹게 말씀드린 것은 아니어도 남편을 통해, 둘러서, 문자로, 분위기로, 싫은 것은 싫다고 반항을 했는데 기가 막히게도 매번 집안싸움으로 번지고는 했다. 굉장히 감정 소모가 컸고, 시가는 나에게 끊을 수도 없는 기분 나쁜 인연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양쪽에서 모두가 진 빠지는 기싸움을 시전 하다 막상 얼굴을 보면 전보다는 미움이 가셨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다행히 어머님과 나는 속과 다르게 겉으로는 잘 웃어 보이는 스타일인 데다, 어머님은 막상 만나면 내게 속을 털어놓으셨다. 그래서일까, 억지로라도 두 달에 한번 꼴로 불려 가서 얼굴 몇 번 보니 마음을 좀 달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시가는 시가인지라 얼굴 보고 마음을 풀어도, 의견 차이만 생기면 내 안에 분이 일었다. 사소한 부분에도 미움이 생기는 덕에 내 마음만 불편했다. 하루는 엄마에게

"시어머니가 이모들 다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어 하더라, 아니 결혼하고 집 구했다고 이모들하고 증조할머니까지 다 끌고 오는 경우가 있나?" 했더니 엄마는 곰곰이 생각하시는 듯 하늘을 보더니만,

"좀 유별나긴 하시다. 근데, 나도 유민이 결혼하면 그 집 구경 가고 싶을 것 같긴 해. 조카며느리가 부담스러울까 봐 못 가는 거지, 허락만 한다면 가서 놀고 싶은데?"


엄마의 진솔한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가 참 많은 도움이 됐다. 우리 가족이라면 사실 이모들이 놀러 와도, 사촌들이 대거 놀러 온대도 그다지 피곤하지 않을 것을, 아니, 오히려 즐거울 것을 그저 내가 모르는 남의 가족들이 온다고 생각하니 미리부터 피곤했던 것이다. 아니면, 그 의도가 불편했을 것이다.


남편은 남녀평등을 엄청 강조하는 사람이다. 여자 입장에 서서 차별받는 여성이 더 보호받아야 한다! 는 입장이 아닌, 역차별받는 남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처음에는 쪼잔하다고 느꼈다. 나는 마음이 넓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그거 하나 양보 못하는 사람을 만나다니..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그 부분조차 왜 남자가 마음이 더 넓어야 하냐며 항의했다. 그런 남편의 솔직한 남자 측의 대변은 나의 생각을 많이 발전시켜주었다.


"시댁에서 비번 막 누르고 집에 들어오는 거 어떻게 생각해?" 한 번은 남편이 물었다.

"아 그건 좀 아니지. 우리의 프라이빗한 공간인데."

"그렇지? 그럼 처가도 안 되는 거야. 나도 불편할 테니까. "


이 대화를 잊지 못한다. 쪼잔함을 한번 더 겪은 파트이기도 하면서 나의 양면성을 본 부분이다. 사실 그전까지는 은연중에 친정은 괜찮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구체적으로 "친정은 돼, 시댁은 안 돼"는 아니었어도 내 마음에서 허용하는 경계선이 달랐다.


남편은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역차별이 존재한다며 울부짖는 짐승일 때가 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말 안 하면 모른다. 나도 언제나 사회에서, 한국 문화 속에서 약자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오히려 이용해 먹은 적도 많았고 (데이트 비용, 힘쓰기 등). 남자들끼리 하는 대화 속에 이런 것도 많다며 내게 남자들만 하는 뒷이야기를 쓸데없이 많이 전해주는 남편은 남자로 살아가는 한국 세상도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여성이 아직도 약자인 부분이 극명하나, 한참 평등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같은 과도기에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저 한 가정 내에서 평등에 대해서 남편과 내가 정의 내린 평등은 이러했다. (사전적으로는 형평성이 더 적합하다.)

출처: IISC 작가: Angus Maguire

"평등이라는 게 예를 들어 이삿짐 나를 때, 너 10킬로, 나 10킬로 드는 게 평등이 아니잖아, 너 힘 약하니까 무거운 거는 내가 들게, 나한테는 많이 안 힘들거든. 하지만 네가 정리는 훨씬 깔끔하게 잘하잖아, 정리는 네가 해.

서로 더 쉬운 거, 더 잘하는 거로 분배하자. 요리도 나보다 네가 더 잘하고 빨리하니까 너 요리하면 내가 설거지할게."


굉장히 효율을 생각한 협의이다.



아마 우리 윗세대들이 협의한 평등의 정의일 수도 있다. 남자가 밖에서 일하는 게 더 효율적이니 일하고, 여자는 아무래도 소프트 스킬이 강하니 가족들과 연락을 담당하고, 육아도 맡고.. 그저 서로의 일이 얼마나 고될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 역할을 바꿔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굳이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고.  


지금의 시어머님, 시아버지들, 지금은 장모님, 장인어른들은 정의가 우리 세대에서도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저 살던 대로 자식들과 자식의 가족을 대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남존여비의 사상도 깊은 바닥에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친정엄마를 봐도, 시어머니를 보아도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종이라는 생각이나 행동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삶이 묻어져 나오는 말투나 행동이 기존의 방식과 너무 다른 우리에게 문제가 될 뿐.


문제는 당연시되어서는 안 되는 누군가의 희생이 일방적으로 당연시되는 것이고, 또 악의적으로 행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싸워이기라고 나는 말하고, 나 또한 그렇게 하지만.

그게 아닌, 다른 삶에서 비롯된 오해라면 미움은 나만 힘들게 하니 그냥 버려버리라고 나 스스로에게 말한다.








배경 사진 출처:

https://www.bbc.com/future/article/20191119-how-climate-change-could-kill-the-red-ap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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