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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서재 Apr 16. 2023

그대는 나를 불멸화하려는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

허무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김영민은 인생에 불현듯 찾아온 허무라는 손님을 영혼의 피냄새에 비유한다. 그래서 대체 이 '허무'를 어떻게 대할 생각인지, 무엇을 할 생각인지, 작가가 준비한 대답이 궁금했다.         


그가 던진 ‘허무’의 바위는 숨이 턱턱 막히는 거대한 돌덩이가 아니라, 어느 해안에 둥글 둥글 굴러다니는 조약돌이다. 허무라는 철학적 명제를 지독하게 사유하기보다, 일정 수준 위에 올라가 오히려 허무와 더불어 살아가기가 가능하다는 역설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가 통달한 허무한 인생의 답은 곧 더불어 사는 삶에 있다는 다소 맥 빠지는 주제를 상정하는 셈이다. 여기서 끝이라면 이 책은 그저 노교수의 인생철학 나열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묘미는 따로 있다.



저자는 정치사상가답게 소식의 <적벽부>부터 스타트를 끊는다.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 위에 영화, 문학, 미술 등을 토핑하여 다채로운 맛을 냈다. 저자는 무척 단출하고 소소한 삶을 표면에 두어 독자들이 쉽게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하지만 김명민이 누구인가? 칼럼계의 아이돌이자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의 탑 아닌가. <적벽부>는 시작에 불과했다. 현학적 허세를 지우기 위해 대중이 알만한 텍스트와 툭툭 던지듯 어렵지 않은 설명을 덧붙인다. 동서남북 종횡무진이다. 어려울 것도 없고 술술 넘어가는 목 넘김에 간간히 유머와 해학이 스며들어있다. 다소 무거운 주제는 금세 희석된다.




사상가는 허무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을까? 진지하고 무거운 장면을 기대하면 안 된다. 니체의 니힐리즘과 까뮈의 부조리를 기반으로 분명 철학이니 사상이니 끼워 넣고는 있으나 결론은 쉽다는 뜻이다. 특히 니체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라'는 메시지는 오늘 네가 허무하더라도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강조점과 통한다. BTS <ON>의 'Bring the pain'이란 가사도 니체의 철학에서 그 맥을 찾을 수 있다. 아이의 상태에서 니체가 그토록 강조한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여 평정심에 이른다는 망각'이야말로, 결국 ‘허무’로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티치아노 베첼리오, <시시포스>, 1548~1549

저자는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를 상기한다. 까뮈는 바위를 굴려 올린 시시포스가 간신히 올라간 정상에서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탐구했다. 저자도 시시포스가 이 덧없는 반복에 굴하지 않고 특히 자살을 하지 않고, 끝나지 않을 영원한 고통을 향해 다시 바위를 굴릴 수 있는 힘에 주목한다. 여기에 인간 실존의 위대한 힘이 있으며 권태를 견디기 위해 다시 일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희망, 자신감, 정의 등 제로섬적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에 눈을 돌릴 수 있으려면 세상에는 다원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가치들에 자유자재로 눈을 돌리고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를 수 있는 탄력이 필요하다.”(p.220)


세상에도 다원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편협한 생각을 버리려고 노력하지만 다원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기 마련이다. 희망이 없어도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이 에세이의 주제인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말은 꽤나 싱거운 평양냉면과도 같은 맛이다. 한편에선 희망, 욕망과 같은 매운맛이 있어야 살아갈 힘이 생기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퇴행을 즐기는 일례로 학위나 청혼 등을 들면서, 이런 힘든 일들을 이미 다 이뤘으니 다행히 아니냐며 너스레를 떤다. 아직 비정한 사회에서 사투를 벌여야 하는 중생 입장에선 이것보다 세상 편한 소리가 없다. 아무래도 퇴행하기를 두려워하거나 계속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이 부분은 좀 편해질 것이다. 또한 목적 없는 산책에 대한 예찬도 이어지는데, 이것은 목적 없는 삶과도 연관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걸으면서 얻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라고 김영민 이상으로 산책에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목적이 꼭 있어야 사는 삶도 있다. 걸으면서 삶과 살 모두를 정리해야만 하는 우울한 인생도 있는 법이다.      


저자는 젊을 때 하기 싫은 일을 참으면서 돈을 벌고 나중에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일갈한다. 젊은이뿐 아니라 다수의 공감과는 먼 말이다. 필연적으로 혹은 우연히 어떤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노동을 해야한다. 선노동, 후행복 순서를 의지대로 정하기 힘든 현실이 기다린다. 간간히 노동을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행복이 따라올 수도 있다.    


      

그는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볼탕스키'의 설치미술작품 <페르손>(=퍼슨)에 비유한다. 거대 집게손은 인형뽑기와 유사하다. 헌 옷을 들어 올렸다 떨어뜨렸다 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기대감에 차올랐다가 곧바로 허무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또한 이 순간을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삶으로 연결해서 이해한다. 과연 그러한가? 유대인으로 가혹한 현실에서 살아남은 볼탕스키 앞에 우리는 허무를 외칠 수 있을까? 이 집게손은 일정시간 내려가서 옷을 한 뭉텅이 집는다. 다시 천천히 올라갔다 집게손을 벌리고 옷을 떨어뜨린다. 모두 정해진 룰이다. 우연도 허무도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MmaOyoOQt4

아르더쿠_BTS 속 숨겨진 서양미술사?!? [봄날 그리고 볼탕스키] 2021


삶에서 우연성을 많이 접했던 사람은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삶은 종교의 섭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집게손의 시간차는 들어 올리는 원인과 떨어뜨리는 결과의 간극이다. 인과에 의해 삶이 지배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 과정이 진행되는 시간 속에서 각자의 스토리가 삶의 옷가지로 쌓여갈 뿐이다.


쇼펜하우워는 “삶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로움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라고 했다,  "허무를 받아들이라"는 김영민의 말도 일리가 있다. 르네상스 역사학자의 "그대는 나를 불멸화하려는가?"라는 말도 마냥 시시한 농담이 아니다. 이제 대답해 보자. 그대는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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