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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mlico May 03. 2022

잘 쓰고 싶다면 우선 말해봐야 한다

영국의 박사과정

영국의 박사 논문지도는 보통 문답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내가 먼저 설명을 간략히 하면 지도 교수님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물어보고, 나는 추가 답변을 하고, 그럼 다시 교수님은 비판 의견을 주면 나는 그것에 관해 보완된 혹은 보완할 의견을 건넸다. 이렇게 토론을 한참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용이 완성되고 교수님은 항상 미소를 띠며 마지막 한마디를 건넨다. "오케이, 지금 말한 내용들을 다음 미팅 때까지 써봐"


신기하게도 말을 해보면 핵심 내용만 다시 정리가 되고, 그것을 글로 써보면 더 논리적이고 명확한 글이 구성된다. 지도교수님과 매달 한 번씩 만나 약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의 논의를 했고, 총 52회의 논문 미팅을 하고 나니 한 편의 학위논문이 자연스럽게 완성되었다. 


영국의 전통적인 박사과정은 말하기(토론)를 글쓰기만큼이나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논문 미팅을 포함하여 학과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세미나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교수, 교직원, 석박사 과정생들이 모여 자유롭게 발표와 질문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매주 이어졌으며 정기적으로 유럽의 다양한 외부 학자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가졌다. 항상 질문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발표보단 질의응답 시간이 더 길었던 건 한국에서 온 나에게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나를 포함 왜 한국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망설이게 될까?! 정리하자면, 말하기와 글쓰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진다.


또 다른 예로는, 박사과정 동안 논문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여러 석사과정 친구들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들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에게 설명을 하면서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다시 정리를 하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지점들을 묻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모두 예외 없이 뭘 써야 할지 이제 명확해졌다고 기뻐하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나는 그저 공짜 커피를 즐기며 흥미롭게 듣기만 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당시 그 친구들은 쓴다는 행위(혹은 내용을 채우는 행위)에만 집착했을 뿐 스스로 묻고 답하며 말해본 경험이 없던 것이 문제였다. 논문의 핵심 구조는 연구 질문과 연구결과(답변)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스스로 치열한 문답 과정 없이 서론부터 차근차근 써 내려가려고 하니 막히는 게 당연했다. 말해보면 무엇을 중심으로 넣고 빼야 할지 그리고 어떤 순서로 구성할지 감각적으로 정리가 된다. 결국 좋은 글을 위해서는 많이 말해보고 많이 써보고 끊임없이 고쳐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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