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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mlico May 03. 2022

박사과정 에필로그: 생각, 샤워, 좋은 아이디어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흥미롭게도 중요한 아이디어들은 샤워하는 중에 떠올랐었다. 잊어먹을까 봐 샤워 도중에 나와 포스트잇을 적셔가며 적기도 했었다. 수십 혹은 수백 장의 포스트잇 메모가 쌓여 짧은 글이 되고, 그걸 여러 번 가다듬어 논문에 넣기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왜 샤워 중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까? 우리 뇌는 생각을 멈춘 뒤에도 그 주제에 관해 무의식적으로 계속 고민한다고 한다. 즉, 생각을 통해 특정 주제에 관한 뇌의 스위치를 켜놓으면 뇌는 이어서 계속 그 일을 해나간다. 반대로 이런 이유로 평소 혹사당하는 뇌의 효율을 유지시키기 위해 충분한 휴식과 요리(음식 섭취)는 박사과정 내내 특별히 신경 썼던 이슈였었다. 


내 가설은 샤워라는 프라이빗한 행위(반복적으로 떨어지는 물의 리드미컬한 소리, 알몸의 해방감, 씻어내는 개운함, 뜨거운 물로 긴장 완화, 나홀로 고요함, 컴퓨터 및 스마트폰으로부터의 격리 등)가 그동안 뇌가 작성한 데이터를 불러들이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지 않나 싶다. 루이스 멈포드는 The Culture of Cities을 통해 현대의 도시공간에서 개인이 혼자 생각, 기도, 명상할 공간이 화장실 말고는 거의 없음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논문을 쓰다가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글이 막히면 일부로 샤워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판기처럼 샤워만으로는 좋은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독서 등을 통해 관련 지식을 꾸준히 입력시키고, 문제에 대한 충분한 고민, 그리고 지도교수 및 동료들과의 토론을 통해 그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이것들을 실제 글로 써서 정리를 해야 가능했다. 따라서 샤워를 통해 떠오른 좋은 아이디어들은 앞의 과정에서 부족한 그 무엇을 메꾸거나 연결시켜 주었으며, 글의 완성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이디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오른다. 기록만이 졸업과 가까워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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