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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언정 Mar 05. 2022

우리 각자가 좋은 답사자가 되길

인생의 좋은 답사자가 되고 싶었던 작은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 

<2020년 10월 29일> 등산 일기 

지난 토요일 오전~

 집에서 뒹굴고 싶은 표정이 역력한 남편한테 살짝 부탁했다. 민준이하고 등산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흠칫 놀라는 표정까지 읽히는데 그래도 남편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따라나서 준다. 참 고맙다^^

 

지난 5개월 정도 매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2~3번씩 꾸준히 민준이랑 뒷산 등산을 했더니 처음에는 힘들었던 그 코스가 이제는 둘 다 너무 만만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코스를 개척하고 싶어서 큰길 건너 앞산으로 진출했는데 지난 일주일 동안 시도한 2번 모두 실패했다^^;;

 

앞산은 처음부터 계속 오르막길이다. 중간중간 경사가 심해서 잡고 갈 수 있는 줄까지 매여져 있을 정도다. 민준이는 5~10분 정도 가다가 '힘들어요'를 외치고, 그래도 조금 더 가보자 하니 몇 발자국 옮기다 또 '힘들어요' 하면서 멈춰버렸었다. 한 번은 막 짜증 내면서 소리도 지르고....

 

그런데 이날은 아빠랑 함께 오니 감히 힘들다는 말을 못 했던 거였을까. 뒤도 안 돌아보고 나 혼자 먼저 앞장서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힘들다고 못 간다고 했던 그 지점을 한참 지났는데도 민준이가 말없이 따라온다. ㅎㅎ

 이 오르막길이 언제쯤 끝날까 싶었는데 다행히 20~30분쯤 오르니 급한 오르막길이 끝나고 정상으로 가는 길과 내려갈 수 있는 갈래길이 나타났다.

 

여기까지 올라와서 보니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길을 몰라서 더 힘들고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을 뿐 중간에 돌아갈 만큼 힘든 코스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민준이도 나도 충분히 오를 수 있고, 지금의 우리에게 난이도가 딱 적당한 길이었는데 오르막길 끝까지 오기 전에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든 생각. 우리의 인생도 답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르막길이 언제쯤 끝나는지, 이 길 다음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안다면 괜히 지레 겁먹고 포기하거나 돌아가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나보다 먼저 비슷한 길을 걸어간 선배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봐주는 교회 지체들의 충고나 조언이 참 중요하고, 내 뒤를 따라오는 후배들에게 나도 내가 먼저 걸은 길에서 알게 된 것들을 푸짐하게 나누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날 한꺼번에 욕심내지는 말자며 정상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오르막길을 불평 없이 잘 따라온 민준이를 칭찬하면서 하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내려오는 도중 벤치에 잠깐 앉아 바람 소리도 듣고, 낙엽도 밟으며 완연한 가을 풍경을 즐겼다.

 

하산길에 민준이에게 이렇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민준아~ 고맙다. 니 덕분에, 네 체중관리 덕분에 엄마가 가을을 느낄 기회를 얻었네. 네가 아니었다면 토요일 오전 엄마는 산에 오를 생각을 절대 못했을걸"

 

우리 아들, 진짜 고맙다.

우리 함께 여기저기 멋있는 산들

많이 가보자꾸나^^




1년 6개월 전에 쓴 등산 일기다. 이 날 등산을 하면서 우리 인생에도 답사가 있으면 좋겠다, 비슷한 길을 가는 후배들에게 내가 좋은 답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이 그 이후 그런 일들이 풍성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부터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내 글을 읽고 팔로우를 하기 시작했고, 밤새워 지나간 글들을 읽었다는 사람, 수십 개의 피드를 한꺼번에 정독하며 일일이 댓글을 단 사람들이 생겼다. 민준이네 팬임을 자청하고 매일 우리 집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댓글부터 선배님을 닮아가고 싶다는 후배들의 고백들이 점차 늘어났다. 


인근에 있는 특수학교에서 선배맘으로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게시글을 올리자 멀리 아래 지방에 사는 후배 맘이 내가 사는 곳까지 와서 강의를 듣고 싶다는 마음을 댓글로 표현했다. 이렇게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낌없이 나누어주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팔로우 분들 중에 신청을 받아 예정에 없던 줌 강의를 진행했다. 한 번만 하려고 했던 줌 강의는 2차로 진행되었고, 나의 솔직한 경험담과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다들 좋아해 주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서로를 팔로우하던 사람들,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웃집 언니, 오빠처럼 친근하게 느끼며 서로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그날 한꺼번에 모였다. 의도치 않게 내가 만남의 광장을 열어 준 셈이 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선배이자 큰언니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등산을 하며 품었던 작은 소망이 1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참으로 신기하다. SNS에서 만난 이 사람들과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좋은 답사자로서 이들을 잘 안내하고 싶고, 내가 가야 할 알 수 없는 미래도 이들의 지지와 응원 덕분에 훨씬 더 힘을 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정말 잘 안다. SNS 게시글에 다 적지 않아도 행간에서 이미 그 마음을 읽어낸다. 얼마나 기쁜지, 얼마나 속상한지, 구구절절 다 밝힐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았는지... 노력하지 않아도 훤히 다 보이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 마음은 장애 아이를 둔 가정을 넘어 현재 삶이 힘든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넓혀진다. 말 안 듣는 사춘기 아이와 씨름하는 부모,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 때문에 속상한 사람, 남편과의 어려운 관계 속에서 행복하지 않은 아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 중에 있는 가정... 장애아이를 키우며 고민하고 좌절하고 힘들어했던 모든 영역은 장애 아이가 없어도 마찬가지로 겪을 수 있는 일반적인 일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나는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삶이 힘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싸안고 혼자 고민하기보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답사자의 안내를 받았으면 좋겠다. 내가 보지 못하는 지점을 제삼자는 정확하게 보기도 하며 그래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길을 안내받으며 오랜 기간 자신을 묶어왔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내가 다 알고 있다는 마음, 남에게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주변에서 좋은 인생의 답사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 좋은 답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 각자에게 꼭 필요한 좋은 답사자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맘을 잘 아는 우리가 서로서로를 도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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