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픈 사람이다.
암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부위만 얘기하면 벌벌 떠는 부위, '췌장'
거기가 돌처럼 굳어가는 병이다. 한 번 굳으면 다시 원래의 생살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한마디로 비가역적인.
다행히 암은 아니지만 어쨌든 췌장 기능은 점점 약화될 뿐, 다시 원기 능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를 아끼는 나로서는 슬플 뿐이다.
솔직히 왜 아픈 사람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는 2017년 초가을 내게 첫 고백을 하고 몇 개월 뒤 나를 차 버렸다.
그 사이 본인의 병을 알았기 때문에 이별 뒤 한참 뒤에야 나를 놓아준 거라 표현했지만
자세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으니 난 그냥 대차게 차인 거였다, 당시엔.
헤어지고 몇 개월 뒤, 그는 정밀 내시경 검사를 했고 화면상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 석화가 진행된 상황이라
이게 오랜 기간 천천히 진행된 것인지 최근에 급속히 전개되는 증상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6개월 뒤 MRI로 그 진행속도를 보고, 굳어진 곳을 제거할지 말지를 결정하자고 했다.
MRI 검사 예정일은 1월 23일이었으니 그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2년 전, 2017년 초가을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좋아한다고, 그래서 만나보고 싶다고 고백을 하더니
그 이후 오히려 연락 횟수는 줄고 만날 기회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어떤 해명도 설명도 없이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 난 불만과 오해만 커져갔다.
어느 날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에 그동안 쌓였던 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설레는 마음을 한 가득 안고 인사동 약속 장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그가 다가온다.
웃지 않는다. 너무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걸까? 아님 너무 더워서?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진다. 아마 나는 이때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이별을.
애써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같이 들어서는 술집이 나름 유명한 영화 배경 장소라
설레발치며 소개를 해도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긴 대화 끝에 그는 날카로운 화살을 내 가슴 깊숙이 박고야 말았다.
" 우리 앞으로 어떡할까요 "
' 읭? 어떡하자니?.. 마음이 변한 건가? 고백한 지 한 달 밖에 안됐으면서? '
" 편하신 데로 해요. 예전처럼 적당히 거리 두고 연락만 하고 살던지... "
' 설마 그러자고 하는 거... 야? '
" 그래요, 우리. 예전처럼 편하게 지내요 "
'!!!!!!'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화가 나고 또 화가 났다. 욕을 퍼부었다, 물론 속으로만.
술을 마실 때면 그에게 주정을 부렸고, 주정을 부리려고 자주 술을 마셨다.
힘들었다. 무엇보다 잘 다니던 회사에서 이유 없는 해고 통보를 받은 것처럼 억울했다.
한 번은 힘들어하는 내게,
" 당신을 떠나게 해 줘서 언젠가는 내게 고마워할 거예요 "
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잠깐.. 하루 동안의 행복을 안겨주고 - 물론 그 첫 고백이 있기까지 몇 번의 데이트도 있었지만 -
끝이 없는 나락에 나를 밀어버린 그를 증오했다. 증오하고 잊으려고 노력했다.
결국,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
증오까지 하게 할 만한 기억이 없었는지 미움만 남았고 그 미움마저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게 작년 꼬박 1년의 기록이다.
'서서히 잊다 못해... 나중엔 서운함도... 미움도 없어져 버렸다'
다행이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아서.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 이별 후 몇 개월 뒤에 털어놓기는 했다, 대충...
작년 늦가을 즈음부터, 그에게 간간이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대뜸 전화가 오기도 하고 카톡도 날아왔다.
마치 어두웠던 시간을 서로 모른 채 하듯 그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
담담히, 가끔은 유쾌하게 농도 주고받았다.
그러나 난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 우리 언제 한 번 밥 먹어요. "
" 그래요 "
" 언제가 괜찮아요? "
" 난 31일 오후가 비어요 "
" 아... 그날은 어려운 데 "
" 그럼 설 쇠시고 봬요^^ "
난 31일 오전에 손세차와 유리막 코팅 시공이 예약되어 있었다.
그는 저녁에 동기 모임이 있다고 했다.
31일 유리막 코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에게 톡이 왔다.
" 우리 오늘 봐요 "
" 오늘요? "
" 네, 오후에 "
나는 그날이 원래 우리가 만나려고 했다가 서로의 사정 때문에 취소된 날인지 잊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동기 모임이 있었다는 것도 당연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얼결에
" 네 그래요, 어디서 뵐까요? "
" 예전에 우리가 만났던 수원역 근처 거기.. "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쇼핑몰 구경을 하면서 기다릴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나타났다. 멀리서...
인사동에서의 무표정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입가의 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어서 간단한 사이드 메뉴를 별도로 제공하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어색했다.
솔직히 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로 아무 말 대잔치다.
새삼스럽게 그때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소상히 얘기해준단다.
그러시라 했다.
그러다가 공통 관심사인 태양광으로 주제가 옮아갔다.
내가 투자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아주 갈기갈기 해부하기 시작한다.
이건 어리석은 투자다, 왜 이런 것도 모르고 투자를 했느냐...
난 억지로라도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려.. 아니 최소한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의 독설이 거의 끝나갔다고 판단되자 난 양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 이제 가시죠. "
" 벌써요? 이제부터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
거의 반쯤 일어섰던 몸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2년 전 마치 그날처럼 ,
그는 내 심장을 저격하는 한마디를 아주 조심스럽게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