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필요해 (에필로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름다운 마무리.

by 똑똑한호구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이직 실패기를 글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언젠가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것만 같았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게 나 혼자 적어놓은 긴 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 인생 처음 이직시도는 아니었지만 소위 호되게 당한 것만 같았던 나의 어쩌다 이직 실패 경험은 결과적으로는 나 스스로 진짜 이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매일 가는 회사가 더 이상 즐거워지지 않았음에도 그냥 월급쟁이의 숙명이려니, 이제 이직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이려니 생각했었고, 먼저 시도해 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이직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더랬다.


피아노학원을 다니는 어린아이들이 콩쿠르에 나가는 이유는 그 콩쿠르에서 상을 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 싶었던 적이 있다.


소심하고 소심한 나는, 무슨 일이든 먼저 손을 드는 것이 참 어렵다. 먼저 손들고 나서는 사람을 소위 나댄다는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나 말고도 나서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보니 나는 그저 협조하거나 혹은 조력자의 역할을 택하는 삶을 살아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조력자가 사회에서 꼭 필요하기도 하고.


그때의 이직 실패기에서도 돌이켜보면 나는 그 자리를 직접 찾아서 쟁취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이었다기보다 연락이 온 곳에 수동적으로 응해서 면접을 봤고 면접일정도 놓치고 노쇼라는 해프닝을 만들었으면서 나는 좋은 결과를 기다렸던 것이다. 물론 결과는 공고를 먼저 발견하고 그 회사에 아는 모든 지인을 동원해서 적극적으로 본인을 어필했던 다른 분에게 자리가 돌아갔다. (물론 내가 더 적극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결론이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지만 ㅎㅎ.)


그 이후 진짜 나의 이직은 내손으로 손품발품 팔아 시작되었다. 진짜 이직의 과정은 그 이전의 실패 스토리와는 전혀 다르게 1차 면접을 보면서 면접관(결국 나의 보스)이 이후에 있을 나머지 모든 면접관들(보스의 보스, 그 보스의 보스)의 일정까지 모두 잡으시는 것을 보고, 음... 이번엔 다르구나 뭔가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모든 휴가를 털어서 면접을 봐야 했던 이전의 면접과는 너무도 다르게 진짜 이직에선 홍콩의 빅보스와의 면접은 한국 휴일에 진행하는 배려(?)를 통해 이뤄졌고 그 빅보스에게 나를 꼭 맘에 들고 싶어 했던 나의 보스는 면접일 오전에 따로 나를 준비시키는 공을 들려주셨더랬다. 모든 면접은 압박은커녕 무사통과의 느낌이랄까? 돌이켜보니 과거 이직실패의 경험은 마치 찐이직을 하기 위해서 호되게 모의고사를 치렀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Royalty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이직을 진짜로 경험하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조직에서 좋은 사람들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조직은 이직을 배신처럼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 몸담았던 조직은 알게 모르게 팀원이 다른 곳에 면접을 보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쩌면 그런 분위기로 다른 곳에 이력서라도 넣었다가 이직에 실패하면 괜히 배신자 프레임에 갇힐까 봐 더 시도를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곳을 떠날 때 counter offer로 남기를 바라는 분들도 있었지만 나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셨던 분들 덕분에 나의 퇴직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오프닝도 중요하지만 클로징도 중요하다.


퇴직 의사를 밝히고 나는 클로징을 준비했다. 그 직장은 나의 20대, 30대를 모두 보낸 곳이었고 내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것이었기에 나는 정말 클로징을 잘하고 싶었다. 그때 그 회사는 이미 수년 전부터 부서이동이나 이직 등으로 결원이 생겼지만 충원은커녕 더 많은 보고라인까지 더해져 오랫동안 일해온 숙련자들도 버거운 업무량으로 힘들어하던 때였다.


"탈출을 축하한다" "너는 진짜 그만둘만했어" 등의 지나치게 솔직한 반응들도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 퇴사얘기를 하려고 리전보스와 1:1을 잡았을 때 사실 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좋은 시점이 아닌데 내가 그만두게 돼서 미안합니다. 나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 전혀 없어요. 회사에게 좋은 시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맞는 시점(right timing)이 있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결정한 곳에서 더 성장할 거라 믿어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한글로 쓰다 보니 약간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그때 나는 그분의 그 말씀에 살짝 울컥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왜 그만두기로 했는지 꼬치꼬치 묻지 않고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 주었던 분들에게 끝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었고 나는 사표를 내겠다고 얘기한 시점부터 출입증을 반납하고 인사하며 나오는 순간까지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누군가 내가 하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문서 패키지만 찾으면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매뉴얼을 국/영문으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내 일을 임시로라도 맡을 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교육해 드렸고 나중에 후임자들이 왔을 때 "그 바이블"만 보면 된다고 했다고 한다.


나의 클로징은 그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p.s. 물론 이직 후의 일자리가 이직 전의 일자리와 비교해서 꿈만 같을 리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렇지만 나는 도전과 실패가 주는 관계, 그리고 실패의 교훈을 얻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첫 이직이란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란 것을 몸소 체험하고 나니 물론 부작용도 있다. 또 이직은 안될까? 하는 미련과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뽑았던 보스가 봤을 땐 괘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괜찮다. 이미 그분도 다른 좋은 곳으로 가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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