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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모멘트 Apr 07. 2021

#2 무턱대고 뚜벅이기

첫 배낭여행, 제주도

무턱대고 뚜벅이기


섬은 둥그니까 한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한 바퀴가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12월의 제주도는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라산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지만, 바닷가에는 따스한 햇살이 물결을 따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길가에 매서운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추울 법한 해변에는 어김없이 온기 가득한 볕이 있었습니다. 어설픈 겨울과 따뜻한 남쪽 기후가 만나 우왕좌왕하는 듯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한겨울 옷으로 가득한 배낭에 하루에도 몇 번씩 겉옷을 꺼냈다 넣기를 반복했습니다. 옷가지가 가득한 가방을 메고 제주도 전역을 누볐습니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기에 공항에서 받아 온 지도를 펼쳐 놓고 친절히 표시되어 있는 올레 길을 따라 왼쪽으로 둥글게 둘러볼 생각이었습니다. 섬은 둥그니까 한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한 바퀴가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같은 방향으로 걷다가, 지치면 다시 버스에 올라타서 여정을 이어 갔습니다.

 

길을 잃을 때면 커다란 지도를 펴서 정류장에 있는 분들께 버스 번호를 여쭈었습니다. 같은 한국어라고 믿기 어려운 제주도 사투리에 손짓발짓을 하며 관광지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버스 창가 너머로 소와 말들을 보고, 올레 길 좌판에 파는 감귤을 양손 가득 사 먹기도 했습니다. 답답해졌던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드넓은 수평선 앞에 앉아있기도 하고, 마음까지 평화로워지는 식물원에서 하루 종일 늘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자전거를 빌려 어촌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해녀 선생님들을 만나 물질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으로 교복을 벗고 누려보는 자유였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이었고,
가고 싶은 곳을 정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하루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방이 바위덩이처럼 어깨를 짓눌렀고, 목적지 없는 발걸음이 흔들렸습니다. 숙소를 미리 정하지 않았던 탓에 저녁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불안했습니다. 간신히 찾은 숙소에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할 때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막막했고, 밤에 길을 찾지 못할 때면 온갖 무서움이 엄습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많아졌고, 외로웠습니다. 특히 당혹스럽거나 힘든 순간에, 혹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자연을 마주할 때면 혼자라는 사실이 서러웠습니다. 굳이 오지 않아도 됐을 제주도에서 사서 고생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할 때까지 말 한마디 할 일 없는 날도 있었습니다.

 

결국 아무도 없는 에메랄드 빛 해안가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색채를 잃고 답답한 일상이 버거워서 도망치듯 떠나왔는데요. 이렇게 다채롭고 자유로운 세상 속에서 또 다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짧은 고단함과 외로움조차 이겨내지 못하고 슬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넓은 제주도 하늘 아래 스스로가 너무 작아 보였습니다. 텅 빈 도로와 인적 드문 올레 길에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파도소리에 묻혀서 울었습니다.

 

해가 기울기를 다 할 때까지 울고 나니, 겨울 바닷바람을 맞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습니다. 여전히 서러웠지만 너무 추워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숙소까지 갈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서두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온갖 속상함이 뒤섞였지만 일단 이 곳을 떠나려면 내딛어야 했습니다. 바위 틈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다시 들쳐 메고, 왔던 길로 방향을 가늠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막상 걷기 시작하니 조금씩 마음이 괜찮아졌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곧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힘까지 났습니다. 작은 걸음도 시작하니 서러움을 내려 놓은 자리에서 멀어지고, 기대하는 장소로 한 발자국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숨 멎을 듯 아름다운 풍경이나 한 없이 주어진 자유가 선물하지 못했던 또 다른 위로가 다가왔습니다.

 

집에서 가장 먼 섬에 와도 다시 답답해지던 마음이 고작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풀어졌습니다. 고단한 발걸음이라도 걷는 끝에 아늑한 숙소가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 곳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기 때문일까요. 앞으로 나아갈 수록 뒤에 남긴 고민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방금까지 바다 앞에서 울던 모습에 실소가 나왔고, 제주도에서 했던 고민들이 후련하게 느껴졌습니다. 학교에서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경쾌하게 집을 향하던 예전처럼 발걸음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여전히 외롭고 추웠지만 느리더라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훈훈한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느 순간 사라졌던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어디에 있든, 늘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졌습니다.

 

새로운 결심을 안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작고 외롭더라도 걸음을 내딛어 보기로 했습니다.




*** 브런치 독자분들을 위한 글

- 1년도 넘게 적은 글들을 매주 한차례씩 전달드립니다.

 - 한 주를 또 치열하게 살아냈을 매주 토요일 밤, 지나온 발자취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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