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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사 이명지 Mar 11. 2020

욕망해도 괜찮아

ㅡ육십, 뜨거워도 괜찮아 02

 생업에서 은퇴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건 ‘하고 싶지 않은 것 안 하기’였다. 그것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니 자연스레 하고 싶은 것들이 추려졌다. 먹고사는 일에만 전념하며 앞만 보고 산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언지, 내 가슴이 욕망하는 것이 무언지 말이다. 너무 오랫동안 제 가슴의 욕망을 눌러두고 산 것이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들에 집중하며 살아온 이들은 욕망하는 것조차 잊은 지 오래다. 심장이 나대지 못하도록 의무라는 붕대로 꼭꼭 싸매고 살아온 탓이다.


 나도 그랬다. 나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며 사는 축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돌아보니 진짜 내 가슴이 원하는 것을 한 것 같지가 않았다. 늘 미진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뭔가 좀 폼 나는 쪽을 선택해 왔던 것 같다. 이제는 내 가슴을 들여다보며 내 감정과 욕망에 좀 솔직해지고 싶었다. 사회적 가식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진짜 나의 욕망…. 슬슬 붕대를 풀어보고 싶어졌다. 뭘까? 뭐가 나타날까? 심장이 쫄깃해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지 않는 것은 걷어내고 하고싶은 것만 하기 시작했다. 가령 먹고살기 위한 일 안 하기, 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 안 가기,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기, 모임 직책 안 맡기, 욕하고 싶은 놈 실컷 욕하기, 얄미운 년 실컷 미워하기, 체면 걷어내기, 화장 안 하기, 다이어트 안 하기, 일상의 규칙들에서 놓여나기, 성실하지 않아도 되기, 전문서적 안 읽기, 바쁘게 걷지 않기,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루기, 원고 청탁 안 받기, 강의 일정 안 받기, 전화 안 받기, 문자 답 안 하기, 싫은 것 싫다고 말하기, 뉴스 안 보기, 성당 안 가기, 먹고 싶은 것만 먹기, 드러누워 뒹굴 거리기, 세수 안 하기, 잠옷 입고 종일 지내기, 샤워 매일 안 하기,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기, 속옷 안 입기, 벌거벗고 집안 돌아다니기, 드라마 실컷 보기, 야한 웹툰 보기, 연애소설 쓰기 등등….
 

원초적 욕구에 자신을 내맡겨 보았다. 방종하고 싶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교육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져 온 규칙으로부터. 그래서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싶었다. 너무 좋았다. 아무도 나를 구속하지 않았고 규범이 나를 야단치지도 않았고 생업이 내 발목을 잡지도 않았다. 정말 자유로웠다. 겨우 몇 달 동안만….


  방종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천국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자꾸 불편했다. 인간에게서 사회적 역할과 대외적인 모습을 홀딱 벗겨놓으면 무엇이 남을까? 진정한 욕망이란 게 대단한 그 무엇 같았는데 벗겨놓으니 참으로 지질했다. 그동안 억제되고 일그러진 진짜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 같은 불편함. 이 또한 교육과 오랜 관습에 의해 체득되어진 모럴의 작용인걸까? 그저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로망에 불과했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동안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에게 보여 진 내 모습이 진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꾸 회귀되어졌다. 어떻게 완전히 다를 수 있겠는가? 보여 지는 것 외에 완전히 다른 내 무엇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오히려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튼 나는 지질하고 누추하지만 나의 있는 그대로의 욕구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중 제일 좋았던 건 생업에서 놓여났다는 것이었다. 30년 넘게 매일 아침 어렵게 잠을 털고 일어나 출근을 하고 정해진 스케줄에 의해 생활하고 즐겁지 않아도 웃고, 의무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비지니스 식사로 에너지를 채웠다. 나는 대학 강단과 비즈니스를 겸하며 일 해 온 터라 늘 시간에 쫒기며 살았다. 마감 기한에 쫓겨 초벌  원고를 던지고, 준비 덜 된 강의록으로 강단에 선 뒤 스스로 흡족하지 못한 강의로 미진함에 시달려야 했던 기억들. 노력에 비해 성과가 미미한 비지니스의 결과들, 그런 것들이 쌓여 자신감의 결여를 낳고 더 나은 최선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려야 했던 치열한 시간들….

은퇴는 그런 긴장감에서 놓여난 게 제일 좋았다. 성공한 사회생활이란 얼마나 욕망을 잘 다스리느냐에 달렸다. 하고 싶은 것을 잘 참고, 하기 싫은 것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의 문제 말이다.


 일상에서 비즈니스 측면을 배제하니 모든 것이 심플해졌다. 인간관계도,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사는 것도…. 새삼 인생이란 생업이 전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퇴 후 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대체로 생업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그만큼 의무와 책임의 세월을 살았단 뜻인가보다.


 그래서 내가 그 의무와 책임에서 파생된 관성의 일상을 벗고 욕망한 것은 춤이었다. 춤, 살사(salsa), 쿠바의 리듬에 재즈, 솔, 로큰롤 등의 요소를 혼합한 라틴 음악에 맞춰 추는 춤, 살사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예술의 전당 '타마라 램피카'의 전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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