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와 "하고 싶어" 사이에서
엄마, 나 파마하면 안 돼?
아들 머리카락이 제법 길어서 미용실에 한 번 가야겠다고 했더니 대뜸 파마 타령이다.
"왜? 파마하고 싶어?"
"응... 파마해서 이렇게 5:5 가르마 타고 싶어."
자신의 머리 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머릿속에서 그려둔 스타일을 설명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요즘 부쩍 거울 보는 시간이 길어진 아들...
문득 예전 한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사춘기 초입에 들어섰는지 알고 싶다면, 거울 앞에 머무는 시간을 보라"라고.
거울 앞에서 머뭇거리는 시간은,
사춘기의 문 앞에 선 아이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시간이라고.
아들은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다.
옷도 그렇고 신발도 그렇고 이제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자신만의 기준이 생긴 아이.
어린 시절의 '귀여움'에서 점점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중이다.
물론 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괜히 걱정이 앞섰다.
"너무 어릴 때부터 파마하면 두피에도 안 좋고 눈도 나빠지는데..."
"힝~ 친구들은 다 하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나만의 기준' 같은 것이 생긴다.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지,
그 기준은 대개 타인이 정해준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과 가치, 경험에서 비롯된다.
다른 집 아이가 뭘 하든 괜찮아 보여도 우리 아이만큼은 아직 안 된다고 느끼는 것.
남들 다 한다고 해도 내 기준에서는 선을 긋고 싶은 순간들.
그 기준은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때로는 '두려움'이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그럼 엄마가 고데기로 한번 해봐 줄까?"
나는 고데기를 꺼내 들고, 드라이기와 스프레이를 준비했다.
앞머리부터 조심스럽게 고데기로 한 올 한 올 웨이브를 만들고 스프레이를 살짝 뿌린 뒤
드라이 바람으로 고정을 시켜줬다.
"됐다! 한번 봐봐."
"흠... 뭔가... 좀 아닌 것 같은데."
"왜? 원하는 느낌이 아니야?"
"이건 좀 웃긴데..."
"파마하면 이런 느낌 비슷할 거 같은데..."
아들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쓸어 넘겨보더니,
거울 속 자기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다.
눈매는 제법 진지했지만, 입꼬리는 슬그머니 내려갔다.
"고데기로 하니까 이상한 것 같아. 미용실 가서 진짜 파마하면 괜찮을 수도 있는데..."
(일부러 이상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봐도 좀 아니다 싶긴 했다.ㅋ)
"근데 너 지난번에 ㅇㅇ이 파마했을 때 뭐라고 그랬어?"
"아... 그때... 진짜 웃겼는데... 뽀글뽀글해가지고... 완전 초코송이 같았는데...
"그니까... 너 처음 파마하면 ㅇㅇ이처럼 될 수도 있어."
"근데 난 그렇게 뽀글뽀글하게는 안 할 건데...
그냥 살짝만 웨이브 넣을 건데..."
"그리고 파마하려면 3시간 동안 꼼짝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야 하는데...
그거 얼마나 힘든데..."
파마약보다 독한, '귀찮음'을 꺼내든 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더 이상 통하지 않겠구나를 눈치챈 걸까?
아들은 결국 파마를 포기하고 타협점을 찾았다.
"그럼 미용실 가서 예전처럼 짧게 자르지 않고 그냥 살짝 다듬기만 할 거야.
앞머리도 눈썹에 닿을 만큼만 자르고..."
"그래... 그럼 주말에 미용실 가자."
아이를 키우다 보면, 매번 '허용할까, 말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때로는 내가 겪은 실패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걱정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는 그 기준 바깥에서 자꾸 자기를 만들어가려 한다.
엄마가 세워놓은 선에 부딪히고, 때로는 넘어가려 하고, 가끔은 돌아서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조절하고, 판단하고, 멈춰 서게 될 때
비로소 나는 안다.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걸.
그리고 나 역시
그만큼 물러서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아이를 키운다는 건,
하고 싶은 걸 다 해주거나 무조건 막는 일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함께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 아이가 앞으로 더 많은 시도를 하게 될 거라는 걸 안다.
멋도 부릴 거고, 누군가를 좋아하게도 될 거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하겠지.
그때마다,
오늘처럼 대화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양보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로 자라 가고 싶다.
근데 아들...
이제 날씨가 점점 더워질 텐데 이왕 자르는 거 그냥 짧게 자르면 안 될까?ㅋㅋㅋ
* 부모 마음 처방전 *
1.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입니다.
아이가 자신을 가꾸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어요.
단, 위험하거나 무리한 시도는 부드럽게 대안을 제시하며 조율해 보세요.
2. 거절보다 더 어려운 건, 조율입니다.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가장 빠른 해결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이해는 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금은 어렵다’고 설명하며 다른 길을 함께 찾는 것이
관계를 더 오래 지켜줍니다.
3. 아이의 타협은 '양보'가 아니라 '성장'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접고 엄마의 말을 따라준 아이, 그 선택 안에는 이미 성찰과 조절이 담겨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채고 칭찬해 주세요.
4.'괜찮은 부모'는 흔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세운 기준이 정말 필요한 선인지,
아니면 내가 불안해서 만든 벽은 아닌지,
아이의 요청 앞에서 가끔은 자신에게도 질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