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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싸우고도 다시 웃을 수 있는 사이

아이들 싸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까

by 커리어포유
너 다리가 왜 그래?

ㅇㅇ이가 볼펜 같은 걸로 그었어.

지난주 목요일, 아들이 허벅지에 기다란 밴드를 붙인 채 집에 들어왔다.

반투명한 밴드 위로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족히 15cm는 넘는 길이의 상처였다.

가볍게 긁힌 수준이 아니었다.

얼핏 봐도 뭔가 날카로운 걸로 확 긁은 듯한 흔적이었다.

"어쩌다가 그랬어?"

놀란 마음에 다그치듯 물었다.

"장난치다가 ㅇㅇ이가 갑자기 필통에서 뭘 꺼내서 확 그었어."

동아리 수업 때 친구 한 명과 가볍게 손장난을 치던 중

그 친구가 필통을 열어서 뭔가를 꺼내 들더니 갑자기 다리를 확 그어버렸단다.

정확히 뭘로 그었는지도 모르겠단다.

상처로 봐선 뭔가 부러져서 끝이 날카로워진 필기구 정도로 짐작됐다.

"처음엔 진짜 막 웃으면서 장난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나도 화나서 클립으로 손등을 찔렀어."

보건실에서 소독을 하고 응급처치를 받고 왔다는데 밴드를 떼어보니 많이 아팠겠구나 싶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핏기가 번진 흔적이, 내 가슴까지 따끔하게 찔렀다.

"안 아팠어?"

"아팠지..."

"근데 이거...

학교폭력으로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실수도 아니고, 위험한 물건으로 일부러 긁은 거잖아."

장난치다가 친구가 갖고 있던 물건에 실수로 긁힌 게 아니라 작정하고 일부러 긁었다는 말에 순간 화가 났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순간 심각성을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잠깐 고민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야, 그러진 마. 같이 장난치다 그런 거니까."

그 순간 아들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나 서운함은 없고

그저 그 친구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만이 또렷하게 담겨 있었다.



나는 작년까지 아들 학교에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위원으로 3년 동안 활동했다.
그 시간 동안 제법 많은 사건들을 접했는데

대부분 아이들 사이에서 장난으로 시작된 언어폭력, 폭행, 따돌림 등이

학교폭력으로 신고된 이후에는 부모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사건의 중심이 아이의 감정이 아니라
점점 부모의 감정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단순한 실수였을지 모르는 사소한 행동이
신고가 들어가고, 조사와 회의가 시작되면
그 사과는 방어로, 진심은 오해로, 설명은 변명으로 바뀌곤 한다.

그리하여 갈등은 더 커지고,
아이들 스스로 관계를 회복하고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는
어른들의 감정싸움 아래서 너무 쉽게 사라진다.

아이들은 이미 서로 마음을 풀고 다시 친하게 지내고 있음에도
"절대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는 어른들의 강경한 입장이
결국 더 큰 싸움, 때로는 법적 다툼으로까지 번지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다.


남편은 사진이라도 찍어 두고, 그 친구 부모에게는 상황을 알리는 게 맞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야 그 아이도 잘못이라는 걸 알고 앞으로 조심하지."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만약 내 아들이 친구 몸에 일부러 상처를 냈는데 남편과 내가 그걸 모르고 있다면 그것도 문제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들의 입에서 나온 "나도 클립으로 찔렀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도 감정적으로 반응했기에

서로에게 상처가 된 상황을 굳이 들춰내지 않고 덮고 싶은 마음이 엿보였다.

그래서 일단은 그냥, 조용히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에 우연히 ㅇㅇ이 엄마를 마주치게 된다면 넌지시 얘기를 꺼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름,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아이의 감정을 먼저 바라보기로 했다.

아들의 말, 아들의 판단, 아들의 회복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ㅇㅇ이는 상처보고 뭐래?"

"사과했어.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근데 내가 화가 안 풀려서 그냥 안 받아줬어."

아이의 말투에는 서툰 어른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사과는 들었지만, 받아줄 준비는 아직 되지 않은 마음.


그리고 오늘...

아들은 그 일이 있은 후 처음으로 ㅇㅇ이와 다시 학교에서 만났다.

"엄마... ㅇㅇ이랑 학교 화장실에서 마주쳤는데 오늘 또 미안하다고 하길래 나도 미안하다고 하고 화해했어."

"그랬구나... 잘했어."




연휴 내내, 아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괜찮아?" "따갑진 않아?"

그저 통증만 살피느라,

'그때 얼마나 놀랐을까.

그 순간, 이 아이는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하는 마음은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스스로 마음을 회복해 냈다.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

사과를 받아들일 준비도,

스스로 사과할 용기도 그 안에 있었다.


부모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곁에서 조용히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또 배운다.


*부모 마음 처방전*

1. 감정보다 먼저 반응하지 않기
놀라고 화가 나는 마음보다 아이의 말을 먼저 들어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아이의 마음이 어떤지를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2. 사건보다 감정을 중심으로 묻기
"무슨 일이야?" 보다 "그때 마음이 어땠어?"라는 질문이 아이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줍니다.

3. 개입할지 말지는 '감정력'을 기준으로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충분한 성장입니다.

4. 흉터는 몸보다 마음에 더 오래 남습니다.
그날의 상처보다, 상처받은 마음이 더 오래갈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많이 놀랐겠다"는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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