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사랑
2008년 6월 17일 오전 9시 17분...
나는 엄마가 되었다.
며느리 사랑이 유별나셨던 시아버님은 언제나 나를
"예쁜 새 아가"라고 부르셨다.
그런 아버님과 결혼 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전화 통화를 했는데
집에서 시댁까지 걸어서 불과 15분 거리였지만 매일 찾아뵙지는 못해 대신 전화로 안부 인사를 드렸다.
사실 남편은 무뚝뚝하고 완고하신 아버님 때문에
자신이 결혼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원래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지 않던가?
아버님께서 날 아끼고 예뻐해 주시는 모습에 남편이 놀란 것은 물론
딸인 시누이도 내심 섭섭해할 정도로 아버님의 며느리 사랑은 지극하셨다.
(아버님은 교육공무원이셨는데 퇴직할 때 받으신 20돈짜리 <황금열쇠>도 며느리인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결혼 후 3개월쯤 지났을 때 아버님께서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다행히 초기라 수술만 하면 괜찮을 거라는 의료진의 말에 내심 걱정은 됐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수술을 잘 마치고 입원해 계시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병원에 찾아뵀다.
아침 방송을 마치고 잠시 비는 시간에 들러
(병원밥이 너무 맛없다 하시면서도 며느리가 있으면 그나마 한술이라도 더 뜨신다길래)
아버님과 함께 점심을 먹고 방송국에 들어가 오후 방송을 하고 병원에 다시 들러 아버님 말벗을 해드리다가
저녁에 퇴근해서 온 남편과 함께 집에 돌아오기를 한 달 정도 반복했다.
그리고 결혼 후 첫 명절을 맞았다.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병원에 계셔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인사를 드리러 갔다.
(아버님은 추석 연휴가 끝나면 퇴원을 하시기로 돼 있었다.)
입맛이 없어 전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셨다길래
없는 솜씨지만 며느리 표 도시락도 싸서 추석 당일 찾아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님께서는 계속 구토 증세가 있어서 힘들어하셨고
증상이 좀 가라앉으면 며느리가 싸 온 도시락 맛있게 먹겠노라 하시며 친정에 가보라고 하셨다.
오후에 다시 들리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나왔는데
그날 오후 어머님으로부터 아버님 병세가 갑자기 나빠져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과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버님은 의식이 없으셨고
그렇게 아버님은 며느리 도시락은 드시지도 못한 채 사흘 만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예상치 못한 이별에 가족 모두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당시 의료과실이 의심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런 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아버님을 떠나보낸 슬픔은 생각보다 컸고 생각보다 훨씬 오래갔다.
아버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나는
너무 많이 울어서 탈진을 한 건지,
아니면 며느리로서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드리러 오신 손님들 맞이하느라 힘들어서 그랬는지
암튼 두 번이나 쓰러졌다.
아버님을 고향에 모시고 집에 돌아와서도 좀처럼 몸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하루는 꿈에 아버님이 나타나 날 보며 환하게 웃어주셨는데
그리고 며칠 뒤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지금까지 아버님이 내 꿈에 딱 한 번 더 나오셨는데 신기하게도 꿈에서 아버님을 뵙고 역시나 둘째가 생겼다.)
우리 부부는
"아버님께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아이를 보내주셨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부모 될 준비를 했다.
이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존재감이 확실했다.
딸을 임신했을 때 아침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입덧이 너무 심해서 임신 초기에 방송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실제로 뉴스 담당 데스크에게만 임신 사실을 얘기하고
방송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얘기를 해 둔 상태였다.)
다른 음식은 도무지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오직 방울토마토만 먹을 수 있었던 나는
새벽에 출근을 할 때마다 방울토마토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방울토마토조차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던 어느 날...
결국 사달이 났다.
생방송 중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고 잠시 뒤 카메라 앞에서 내가 사라졌다.
임신성 저혈압으로 쇼크가 와서 쓰러졌고 그렇게 방송국 전체에 나의 임신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줄이긴 했지만 만삭까지 계속 데일리 방송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첫째는 유난히 말이 빨랐다.
말문이 트이고부터 정말이지 1분 1초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아이였다.
애들이 처음엔 다들 "할미""하비"라고 한다는데
바로 "할머니""하부지"를 외쳤고
두 돌도 채 안 된 아이가 동요는 물론 외할아버지의 애창곡인 나훈아의 <사내>까지 따라 불렀으니...
다른 엄마들처럼 나 역시 이 아이가 혹시나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아주 잠시 했었다.^^
암튼 임신 사실을 만천하에 한방에 알린 이 아이는 이후로도 뱃속에서 나를 계속 힘들게 했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 때문에 힘들게 하더니
임신 중기에는 배 뭉침 때문에 눕는 게 힘들었다.
눕기만 하면 배가 단단하게 뭉쳐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어쩔 수 없이 6개월 경부터 출산 때까지는 앉아서 자야만 했다.
몸이 힘든 건 그나마 참을 수 있었는데
기형아 검사 결과 다운증후군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 같아 하염없이 울면서 보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맘이 많이 힘들다.
금요일 오후 늦게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월요일 다시 병원에 갈 때까지
정말이지 밥 한 숟가락, 물 한 모금 넘기기가 힘들었다.
양수검사를 하면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그것이 태아에게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와 함께
수치가 아주 나쁘진 않으니 일단 자신을 믿고 기다려보자는 담당 선생님 말에 알겠노라 했지만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다운증후군은 다른 장애와 달리 외모에서 바로 표시가 나기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 바로 알 수 있다기에
출산 때까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출산이 임박하면 입체 초음파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했지만
설사 결과가 나쁘다 한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더 이상 검사는 하지 않겠노라 말씀드렸다.
그렇게 불안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시간이 지나고
예정일이었던 2008년 6월 15일 새벽에 진통이 느껴졌다.
시간 간격이 짧아져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할 때쯤 다시 진통이 잦아들었다.
가진통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다시 진통이 시작됐다.
하지만 참을만했다.
사실 임신 중 배 뭉침이 너무 심했던지라 웬만한 통증은 참아 넘길만했다.
이번엔 진짜 진통인 건 알겠는데 이 정도 통증에 병원을 가야 하나? 고민했다.
'하늘이 노래져야 아이가 태어난다는데...
아프지만 참을만하잖아...
괜히 일찍 병원 가면 가서 오래 진통해야 하니까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티다가 가야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몸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들어(이슬이었다) 결국 남편을 깨워 병원에 갔다.
(솔직히 이때까지도 참을만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오전 6시...
담당 선생님께서 아직 출근 전이라 당직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이미 30% 정도 진행이 됐다 하셨다.
금방 가족분만실로 옮겨주겠다는 얘기를 듣고 분만대기실에 혼자 누워있는데 조금 무서웠다.
모든 준비(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자연분만을 위한 몇몇 과정)를 끝내고 누워있는데
진통이 점점 심해졌다.
(아... 조금 전과는 분명 달랐다... 하늘 색깔이 점점 노래지는 것도 같았다.)
결국 무통주사를 맞았고
갑자기 진행속도가 너무 빨라져 가족분만실로 가기는 힘들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앗... 원래 드라마 보면 출산할 때 옆에 있는 남편 머리카락도 좀 쥐어뜯고 욕도 좀 하고 그러던데...
나는 그거 못해보는 거야?ㅋㅋㅋ)
그러는 사이 9시가 넘어 담당 선생님께서 도착을 하셨다.
그런데 내 배를 보시던 선생님께서 다급하게 간호사를 찾으셨고 나는 바로 옆 분만침대로 옮겨졌다.
의사 선생님께서 자궁 모양이 좋지 않다며
몇 번 시도해 보고 안 되면 응급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덜컥 겁이 났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이 보고 싶었다.
어떻게든 수술을 하지 않으려 용을 써봤지만 쉽지 않았다.
마지막에 결국 흡입 분만을 시도했는데
간호사 두 명이 내 배 위에 올라타 배를 사정없이 누르는 순간
너무 아파서 잠시 정신줄을 놓았나 보다.
"오전 9시 17분...
건강하고 예쁜 공주님입니다."
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엄마가 돼 있었다.
그렇게 날 엄마로 만들어준 딸이 태어난 지 18년이 지났다.
막막하고 두려웠던 첫날밤, 작디작은 아기가 내 품에 안겨 잠들던 그 순간의 체온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아이가 지금은, 나만큼 키도 크고 가끔은 내 마음까지 읽어내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18년 동안 부딪히고, 후회하고, 그러다 또 다짐하길 수백 번.
감정코치라고, 대화법을 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말보다 마음을 들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딸에게는 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런 엄마를 참 많이도 자라게 했다.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눌러 삼키는 법도,
끝까지 기다려주는 인내도,
사랑한다는 말보다 먼저 믿어주는 용기도,
나는 그 아이에게서 배웠다.
내가 딸을 키운 게 아니라, 딸이 나를 엄마로 키워낸 시간.
그 18년을 지나오며 문득
'엄마라는 이름은, 아이와 함께 천천히 자라 비로소 진짜가 되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불완전한 엄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조금은 나아졌다고,
딸 덕분에 더 괜찮은 어른이 되어간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딸이 내 브런치를 보더니
"엄마 브런치 읽는 사람은 난 세상 나쁜 딸이고 ㅇㅇ이는 세상 다정한 아들인 줄 알겠다." 며 억울해한다.
'그래, 너도 알고 있구나. ㅋㅋㅋ'
하지만 딸...
언제나 엄마의 첫 번째 사랑은 너였어.
내가 엄마라는 이름을 처음 갖게 해 준 사람,
처음으로 품에 안은 내 전부.
그게 바로 너였지.
네가 처음 웃던 날, 처음 넘어졌던 날, 처음 엄마를 불러준 그 순간들...
모두 엄마 가슴 깊숙이 새겨져 있어.
글로 다 쓰지 않아도, 그 기억은 결코 흐려지지 않아.
언젠가부터 사춘기다 뭐다 부딪히는 일도 많고,
엄마도 코치라는 이름 앞에 자꾸 흔들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의 첫 번째 사랑은 변하지 않아.
너를 향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랑.
그러니까 억울해하지 마.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앞으로 하나둘 꺼내어 써볼게.
그땐 독자들이
"이 엄마 알고 보니 딸 바보였네" 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건, 진짜니까.
지난주 생일이었던 딸이 뜬금없이 다른 선물 다 필요 없고 엄마에게 손 편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몰래 다이소에 가서 1000원짜리 편지지도 미리 사 뒀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결국 손 편지는 쓰지 못했다. (사실 이 출산스토리도 생일 당일에 올리려고 했는데 아픈 바람에 한 주 미뤄졌다.)
딸...
손 편지 대신 널 낳자마자 다이어리에 끄적인 이 메모로 어찌 안 될까나?^^
사랑이(딸 태명)를 품에 안았다.
따뜻하다.
이 작은 생명체가 내 딸이라니...
예쁘다...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다.
손가락도 10개씩, 발가락도 10개씩...
건강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아...
밤새 엄마 배가 아파서 새벽 6시에 병원에 도착했단다.
그리고 9시 17분,
드디어 사랑이를 만났어.
아빠가 옆에 없었지만 엄마랑 사랑이는 씩씩하게, 정말 잘 해냈단다.
고마워, 사랑아.
엄마에게 와줘서.
건강하게 태어나줘서.
그리고 나에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이름을 선물해 줘서...
으이구 이쁜 내 새끼!!!
우리 앞으로도 잘해보자.
함께 천천히, 오래오래...
-너를 처음 품에 안은 날,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