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냥 놔둬도 괜찮은 걸까?
엄마, 우리 쇼핑 가자.
시험이 끝난 주말, 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여름옷이 필요하단다.
나간 김에 맘에 드는 게 있으면 내 여름 원피스도 하나 사야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다.
근데 막상 나가려니 귀찮았다.
화장하기도 싫고 머리도 안 감아서 그냥 대충 모자나 눌러쓰고 가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씻고 나온 딸이
"엄마, 준비 안 해?"
"나 그냥 옷만 갈아입고 나갈 건데..."
"딸이랑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건데 너무 한 거 아냐?"
라며 툴툴거렸다.
자기 옷을 사러 가는 게 좋아서일까,
엄마랑 외출하는 게 좋아서일까,
분간은 안 갔지만 딸의 표정에선 설렘이 묻어났다.
'무슨 딸 시집살이도 아니고... 나 원 참...'
결국 간단하게 화장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만졌다.
편하게 입고 가려던 생각도 바꿨다.
원피스를 꺼내 입고 운동화 대신 굽 낮은 구두를 꺼냈다.
막상 또 차려입고 보니 외출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백화점에 도착하자 딸은 눈에 띄게 설레는 표정이었다.
뭔가 생각해 둔 디자인이 있는지 블라우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티셔츠를 살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프릴이 있는 흰 블라우스만 찾는 딸을 보며 조금 의아했다.
피팅룸을 들락날락 거리며 이것저것 입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은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엄마, 나 너무 돼지 같아?"
"응.."
"아무리 그래도 딸한테 돼지가 뭐야?"
"날씬해 보이지는 않아."
솔직한 엄마의 대답에 툭 던지듯 말했다.
"나 다이어트할 거야."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살찐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하긴 했다.
작년부터 갑상선 기능 저하증으로 약을 먹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체중이 갑자기 좀 늘었다.
그렇다고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닌데
한참 외모에 관심이 많을 나이라 그런지 신경을 많이 쓰는 눈치다.
"꼭 흰 블라우스여야 해?"
"응... 흰색 블라우스 입고 싶어."
아무래도 흰색이 좀 더 부해 보일 것 같아
(사실은 흰 옷마다 음식 얼룩을 묻혀와서 세탁하는 게 귀찮을 것 같은 이유가 더 컸다)
다른 컬러나 블라우스 대신 티셔츠가 어떠냐고 했더니
꼭 흰색 프릴이 있는 여성스러운 블라우스를 입고 싶다고 했다.
매장을 몇 군데 더 돌아다니다 드디어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찾았다.
거울 앞에 서 있는 딸을 보는데
막상 입혀놓고 보니 예뻤다.
“블라우스는 샀으니까, 이번엔 청치마 보러 가자.”
청치마?
딸은 어릴 때부터 치마를 잘 입지 않았다.
예쁜 원피스나 스커트를 사다 줘도
불편하다며 밀어냈다.
공주처럼 입히고 싶었던 엄마의 로망은
아이의 단호한 거부에 매번 꺾였다.
그래서 어릴 적 사진을 보면 대부분이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도 아이 옷을 고르는 기준이
편안함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딸이 이제
프릴 달린 흰 블라우스에 청치마를 고르고 있다.
"근데 너 블라우스랑 치마 입고 어디 가려고?"
"친구들이랑 놀러 갈 때 입으려고..."
딸은 별생각 없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내 안은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쁘게 입고, 가꿀 줄 알고,
스스로를 표현할 줄 아는 건 좋은 거야.'
'요즘 애들 다 그래.'
머리는 그렇게 말하는데
가슴은 자꾸 다른 소리를 낸다.
'공부는 안 하고 자꾸 다른 데만 신경 쓰는 거 아냐?'
'그새 또 남자친구가 생긴 건가?'
(딸은 지금 잠시 연애 휴식기 중이다.ㅋㅋ)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마음속에선 잔소리가 떠다녔다.
'놀러 갈 생각 그만하고 공부 좀 하지.'
'외모 고민 할 시간에 제발 진로 고민 좀 하자.'
오랜만에 엄마와 외출해서 마음에 드는 옷을 사고
한껏 좋아진 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입밖으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속은 복잡했다.
외출할 때마다 공들여 화장하는 것도,
(내 눈엔 화장 안 한 얼굴이 더 예쁜데...)
공부는 안 하고 외모 체크만 하는 모습도,
(책상 앞에 앉아서 책 보는 시간보다 거울 보는 시간이 더 긴 거 아냐?)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험 성적은 늘 제자리걸음이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깊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옷차림은 점점 어른스러워지고
화장하는 손길도 제법 능숙해졌다.
이런 딸의 변화를 지켜보는 건,
기쁘면서도 두렵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건 알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자꾸만 조급해진다.
딸이 어른이 되어가는 만큼,
나도 함께 성숙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놓아지지 않는 생각들.
'정말 그냥 놔둬도 괜찮은 걸까.'
그 질문을 삼키며 또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