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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출 Apr 11. 2017

내가 소망하는 집은

내가 소망하는 집은





 태곳적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우주의 집, 생명의 집, 자연의 집 등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집은 없다. 생명이 존재하는 곳 어디에든 집은 존재한다. 동굴 깊숙한 곳 어머니의 아기집에서 태어나 집 밖으로 탈출하는 순간 불안하고 무서워서 앙앙 울었다. 벌거벗은 그때의 기억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집은 누구나 갈망한다. 심지어 동물들도 집을 갈망한다. 집은 삶의 자체인 양 매몰된다.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는 출근길. 가로등 상단 지지대에 까치 두 마리가 집을 짓고 있다. 까치는 부리로 연신 나뭇가지를 쪼아대며 집 짓는데 만 열중한다. 주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는 까치집을 바라보면서 집이란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집은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보금자리이다. 집은 생명과 안전을 보호받고 보전하며 비밀을 보장받는 특별한 자신만의 공간이다. 집은 감동보다는 편안해야 한다. 불편한 집은 집으로서 가치를 이미 상실한 것과 같다. 집의 소중함을 언급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집 없는 사람은 서럽다. 집이 없다 해서 반드시 서러운 것은 아니지만, 집 자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서러운 것이다. 여러 걱정 중 집 걱정만 안 해도 살만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히려 집 때문에 화를 불러오고 불행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고 보면 집과 사람이 잘 통해야 만이 즐겁고 행복하고 편안해질 수 있다. 
 인간에게 최초의 집은 자연이다. 자연이 파괴되고 생각이 고정되고 물질문명이 넘쳐나면서부터 집은 집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움집을 만들어 원시생활을 해왔던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부러운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 없다. 나 어릴 적엔 시골에서 기와집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 부잣집 소리를 듣던 시대가 있었고 초가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굶주린 가난에서 해방되어 미소를 짓곤 했다. 요즘은 도시와 농촌 막론하고 고층 아파트가 빽빽하다. 집의 구조는 몰라보게 다양해지고 편리해졌다. 편리함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성싶다.

 가끔 미래의 집을 상상하곤 한다. 미래의 집을 상상하면 왠지 소름이 돋는다. 인공기능장치가 장착되고 로봇과 함께 생활하는 미래의 집, 과연 사람이 살만한 집인지 겁이 덜컥 난다. 바다 위의 집, 해저 속의 집, 하늘에 떠 있는 집, 땅 위를 나르는 집 등이 스쳐 간다. 인간의 삶이란 환경과 기후, 문명의 발달과 생활양식에 따라 달라진다. 집은 웅장하거나 으리으리하거나 위압감을 주거나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집은 오로지 편안해야 한다. 집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집은 우리가 가장 많이 생활하는 공간이고 가장 편안한 곳이기에 내가 소망하는 집은 티타늄으로 만든 집이다. 해돋이와 해넘이 하루가 저물어도 영혼이 맑아 대지와 나무와 하늘과 바람이 머물다가는 등 따습고 배가 불러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집, 그 집에 머물다가 조용히 혼자 떠나가리다. 
 내가 소망하는 기형도의 ‘빈집’이 떠오른다. 나는 기형도의 시작품에 대하여 논문 한 편 발표한 적이 있다. 시인만큼 멋진 집을 짓은 사람도 세상에는 드물 것이다. 부재한 공간의 이미지 확장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시인, 현실주의 세계관을 모색한 허무주의 시인, 연시를 거부한 시인, 그의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절망은 여러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생명체의 존재가치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하는 빈집뿐일 것이다. 나도 기형도 시인처럼 살아생전에 빈집 한 채 짓고 싶다.

     



*이미지출처: 일본야후(TITALIUM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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