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시비 월(示毘月)'이란 아들 일기장에서 훔쳐본 글이다. 후, 벌써 12월이네! 남자한테는 군 전역 후 1년이 무척 중요하다는데 암이란 녀석 때문에 올해는 절반 이상 입원과 통원으로 병원 생활만 했어…. 돌이켜보면 정말로 짧은 스물네 해 동안 가장 힘들었고 견디기 어려운 1년이었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죽고 싶을 만큼 참 힘들었어, 처음으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과 이별, 그 충격에 아픔, 병 때문인 육체적 고통, 왜 하필이면 '내가 암에…'라는 피해 의식, 전역한 후, 세상에 쳐지지 않으려면 무엇 하나라도 해야겠다는 강박관념, 하고 싶었던 연기에 대한 갈등, 동기생들은 어느덧 졸업을 바라보는데 복학조차 못 하게 된 것에 대한 한숨, 참 화가 나더라.
주변에서 ‘요즈음 힘들다.’라는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그럴 때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 봐, 너보다 더 어렵고 힘든 처지인 사람들을 떠올려봐.’라고 쉽게 말해놓고 스스로한테는 왜 이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힘들어야 했었는지, 한창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중, 병원에서 한 아이를 보았다. 초등학교 5~6학년 남짓으로 보이는 그 여자아이의 머리칼은 거의 다 빠지고 두피가 갈라지고 깍쟁이가 붙어 있었지만 몇 가닥 머리카락은 민둥산 자락에서 마지막 생명력을 유지하며 힘겹게 버텨내는 잡초처럼 보여 그 아이의 현재 상태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양 콧구멍에는 우악스러운 고무호스를 꽂고 휠체어에 몸을 겹쳐놓은 듯 가여운 그 아이를 본 순간 ‘정말 이 아이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내 그동안 우울했고 힘들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나약함에 실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결국 그런 감정들은 나에 대한 화난 마음이 되었다. 이것이 스스로 다그치고 마음을 잡아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겨울 동안 쌓인 눈은 봄이 오면 녹아내리는 게 금방이듯이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은 멀어져갔고 긍정적인 시야를 넓혀가며 비록 치료 때문에 이런저런 제약이 많긴 해도 나름대로 잘 견딜 수 있다. 병원 가는 길은 새로운 삶의 계기를 마련해 줄 거란 믿음과 희망의 길로 변했다. 또한, 앞으로 치료가 몇 번이나 남아 있나 세어보고 조바심을 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서 있던 그 아이에게 ‘고마워, 너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나에겐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줬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 미안하고 이기적이고 소갈머리 없는 못할 말이었으니까. 치료를 기다리면서 이름도 모르는 그 아이를 내가 치료가 거의 끝나가던 그 주부터 보지 못했다. 치료를 받던 암 환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상황에 해당한다. 더는 치료가 무의미했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하여 치료를 중단하거나, 아니면 보통 4~6주로 계획된 치료가 모두 끝났거나, 병원 측에 그 아이에 관해 물어볼 용기가 없던 나는 그 아이가 위의 두 가지 중 전자 쪽일 경우엔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쉬고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꼭 건강하게 살아가길 염원했다. 후자 쪽일 경우엔, 힘든 치료를 잘 견디어 낸 것이 기특하다. 꼭 완치되어 무럭무럭 자라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용기가 없어 전해주지는 못했지만 늦게나마 미안함과 함께 기원한다. 12월은 지난 일 년을 정리하고 돌아보면서 다가올 새해를 맞이할 준비하는 달이다.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은 길고도 고통스러웠지만 끝내 나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나 자신을 한 단계도 아닌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치료 기간에는 몰랐던 부모님의 사랑을 알았고 몇 명 되지 않은 숫자였지만 가식 없는 우정을 알았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나쁜 습관들, 알고는 있으면서 쉽게 고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정말로 진지하게 반성해보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내일모레, 치료가 끝난 후 첫 정기검사 하는 날이다. 물론, 좋은 쪽으로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그 반대라도 나는 두렵지 않고 초연하게 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앞으로 5년간, 만약의 경우에 어떤 일이 생겨도 차분하게 상황에 맞설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동안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남들이 한해를 정리하는 이달에 나는 하나하나 시작해 보려 한다. 어제 눈이 많이 내려서인지 오늘 밤하늘이 꽤 맑다. 17층 창문 바깥에는 12월의 밝은 달이 보인다.(아들의 일기장 『12월, (示毘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