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일손이 한창 바쁠 때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죽어라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엄마도 허리 아프고 힘들어 죽겠다 손도 다 갈라지고 무릎도 아프고..." 하면 결국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결국 엄마의 불쌍함에 져서 못 이긴 척 도우러 가지만 하루 종일 투덜대며 난 늘 저렇게 말했다.
지금은 아예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원래 자기 일이 제일 힘들고 남일은 쉬워 보인 다지만 부모님이 농사를 때려치우고 식당일을 하면 차라리 설거지는 더 잘 돕겠다고 했다.
정 농사를 지을 거면 쭈그리고 앉아서 할 필요 없이 과수재배를 하던지, 남들은 농사지어도 벤츠 끌고 다닌다는데 특산물 잘 지어서 떼돈이라도 좀 벌던지, 이건 뭐 죽어라 힘만 들고 당장 때려치웠으면 좋겠다 했다.
그럼 엄마는 식당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돈도 못 버는 게 자기가 용돈 줄 것도 아니면서 때려치우라 마라냐 하고 코웃음을 쳤다.
엄마가 힘든 게 싫어서 어릴 땐 형제자매들 중 곧잘 심부름도 잘했다. 그래서 늘 엄마는 두리야, 두리야 하고 내 이름만 닳도록 불러댔다(두리는 어릴 때 아명,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는 구시대적 집안의 산물로 내 밑으로는 꼭 아들을 낳아 딸은 둘만 갖자는 뜻으로 그 시절엔 둘째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곤 했다 한다. 하지만 내 바로 밑에 동생은 또 딸).
어느 순간 그걸 깨닫고 "언니나 동생들 시켜! 왜 자꾸 나만 불러!!" 하고 개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음이 불편했지만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곧 엄마 입에선 내 이름보다 동생의 이름이 더 불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한놈만 판다.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나랑 엄마는 늘 입씨름을 했다. 모든 엄마들이 시전 하는 엄친아에 반격하는 나의 자세다.
엄마: 너희는 어째 그리 엄마 힘든 줄도 모르고 인정머리가 없냐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냐 다른 집 애들은 알아서 잘만 돕던데
나: 다른 집 엄마들은 자기 새끼 귀해서 아무 일도 안 시키고 귀하게 곱게만 키우던데, 그런 애들이 시집가서도 힘든 일 안 하고 곱게 산다고 자기 손으로 팬티 한 장 안 빨게 한다더라
엄마: 넌 언제 시집갈래? 맨날 일이나 때려치우고, 다른 집 애들은 시집가면서 돈 한 푼 안 받고 다 알아서 가고 남은 돈도 엄마한테 다 주고 간다던데
나: 허이고~ 엄마는 그런 얘기만 들었나 보지? 난 다른 애들 집에 돈 많아서 맨날 해외여행하고 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얘기만 듣는데, 아~ 나도 돈 많은 집 태어나서 돈 팡팡 쓰고 살고 싶다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다 자기들 입장에서 자기들 기준으로만 보고 싶은 거다
엄마: 주디(주둥이, 입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가 보살이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어디서 내 배에서 저런 게 나왔을꼬 내가 저런 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네. 저 나이 먹도록 시집도 안 가고 동네 개처럼 빨빨 싸돌아 다니기나 하고
나: 우와 대박, 출생의 비밀인가! 내가 개였나? 그럼 개를 낳은 건 누구지??
그렇다. 난 베스트 오브 베스트 후레자식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버티다 마늘 자르는 일을 도우러 갔다. 결국 난 앉은 김에 로봇처럼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발버둥쳐도 노예는 노예다
"와서 하면 잘할 놈이 맨날 안 온다고 버티고, 구시렁거리고"
"그래 그러니까 안 오지! 일 하고 나면 몸을 제대로 못 쓰는데!! 일을 너무 잘해서 탈이야 마늘을 다 못 쓰게 쪼사 놔야 안 시키려나"
한 자리에 모아다 주면 그냥 그늘에 가만히 앉아 자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주말 이틀 동안 도와주고 나서 난 할머니가 되었다. 허리 인대가 늘어났는지 제대로 설 수도 없고, 오래 앉았다가 일어서면 걸을 수도 없어 바로 주저앉았다.
엄마는 하도 일을 안 하다 해서 그렇다며 글루코사민이라도 먹고 가라 했다. 내가 할매냐고 안 먹는다고 소리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서른다섯이면 할매 맞다며 엄마도 웃었다.
허리를 못 쓰게 될 정도로 아프고 나니 다음 날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을 시킨 엄마가 밉고, 이 아픈 와중에도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내 신세가 서글펐다.
하루정도 누워서 나을 일이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쉬었겠지만 금방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수업을 하느라 앉아 있다가 일어설 때마다 얼마간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주사를 맞고 나니 걸을 만은 했다. 의사는 물리치료를 받고 가라 했지만 겨우 짬을 내서 병원을 들린 것이라 그럴 시간은 내게 사치였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도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노예다.
내 몸을 직접 쓰지 않고도 소극적 소득을 벌어들이며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노예해방의 날을 꿈꾸는 혁명가의 정신으로 오늘도 글을 쓴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 게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