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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령 Jun 04. 2019

아직 젊은 여자의 로망

길을 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 잡고 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황혼의 문턱에서 저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늙어 가는 건 어떤 마음일까.

오랜 친구, 연인, 가족 그런 표현으로는 한참 부족한데 겪어보지 않으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오늘 비가 오는데 손주를 업은 할머니와 우산을 씌워주는 할아버지가 나란히 산책하듯 걸어가는 뒷모습이 예뻐 보여 바쁜 출근길 와중에 나도 모르게 잠시 서서 사진을 찍었다. 아기띠가 아닌 오랜만에 보는 포대기도 정겹다.

저 아이는 커서 저 장면을 기억할까.


나는 아주 어릴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가끔 수업하는 아이들 중에 세 살 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처음엔 믿지 않았는데 책을 보면 어떤 이는 아주 아기 때의 일을 기억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 아이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묘사하는 그 장면을 들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 등에 업혀가는 저 아이도 꼭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하고 오지랖 넓은 생각을 해보았다.

한 발 더 나아가 미래의 그 아이가 되어 미리 추억을 재구성해본다.



"비 오는 5월의 어느 날, 보슬보슬 기분 좋게 내리는 비에 건너편 장미 향이 풍겨져 오는 듯하다. 공기는 눅눅하지 않고 선선해서 좋다. 할머니 등에선 언제나 할머니에게서 나던 특유의 냄새가 풍겨져 온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할머니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언젠가 이십대 초반쯤이었던가. 확실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관광지였는지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어느 중년부부가  손을 잡고 길을 걷다 가볍게 뽀뽀를 쪽 하며 가는 걸 보았다.

 시골에 사는 무뚝뚝한 경상도 부부인 우리 부모님만 보고 자란 나는 전혀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와! 결혼하면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바보야, 밖에서 저러는 아줌마 아저씨들은 다       불륜이야"

"뭐래~ 내 환상 깨지마"

"백 프로는 아니어도 대부분일걸?"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좀 순진했다.

지금 같은 사회 분위기에선 얼마든지 밖에 나와서도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게 이상하지 않지만 그때의 사회 분위기는 그게 가능했던가. 여튼 흔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심지어 젊은 커플도 밖에서 드러내 놓고 스킨십을 즐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구라는 보수적인 도시여서 더 그랬던 건지 아닌지는 다른 곳에 안 살아봐서 모르겠다.

여튼 그 사람들이 진짜 부부인지 불륜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밖에서도 그 정도의 가벼운 스킨십은 눈살 찌푸리지 않는 분위기가 좋다.

오죽하면 남자 친구가 생겼었을 때, 길거리에서도 껴안고 키스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프랑스에 가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나니까.


다정한 프랑스 연인들


황혼의 커플은 왠지 이런 불륜의 의심도 다 피할 것 같다. 보고 있으면 사랑스럽고 애틋한 마음뿐이다.

어릴 땐 노년의 사랑이라 하면 왠지 주책맞아 보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노인은 불타는 마음이나 사랑 같은 감정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눈물겹도록 따뜻하고 낭만적인데.

말이지 '사랑'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평생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짝이 있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서정주 시인과 그의 아내

내 늙은 아내 - 서정주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 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서정주 시인의 시다.

지금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지만 갈대 같은 나는 어찌 될지 모르니 혹여나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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