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엠제이 Jun 12. 2024

도리깨질

눈으로는 옥상 난간 너머로 사람과 자동차를 보고 있지만 향미의 신경이 향한 곳은 다른데 있다.   

[BREATH]를 훔쳤다는 무철의 선언에 가까운 그 말, 목구멍이나 장기 어딘가에 걸려있는 그 말 때문에 향미는 찜찜하고 불편하다. 소화제를 먹어서 내려보낼 수도 없고 이것 참. 옥상 난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향미는 두 개의 생각을 저울질한다.        


하나, 무철이 [BREATH]를 훔친 범인이라는 것을 회사에 알린다.   

둘, [BREATH]를 훔친 무철의 동조자가 된다.  


과연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애초에 더 좋은 선택지는 이 중에 없는 것이 아닐까, 지금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회사에 열심히 다닌다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착실히 잘한다든지, 더 복잡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회사를 그만둔다든지.   

    

무철 : 어때? 나랑 같이 [BREATH]로 큰일 한 번 해보지 않을래?  


무철의 이 말이 향미는 귓가에 울린다. 몰랐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제 와서 그럴 수 있을까. 무철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믿어도 될까. 지금까지 향미에게 무철은 호기심이 이는 사람, 알면 알수록 궁금한 사람이지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무철이 말하는 ‘큰일’이라는 건 뭘까. ‘큰일’ 한다고 설치다가 내가 ‘큰일’ 치르는 건 아닐까 몰라. 무철의 첫 제안이 보름 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지 무철이 다시 물어본 게 일주일 전, 향미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 계획이 달라질 것 같으니 이제 결정을 한 다음 알려달라고 무철이 말한 게 바로 어제다. 오늘은 뭐가 되었든 결정해서 무철에게 말해야 한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향미는 저 아래 장난감처럼 조막만 한 사람을 향해 손가락을 대본다. 손가락 한마디 보다 작은 사람과 자동차들. 옥상에서 바라보니 모두 작고 하찮다. 


인섭을 통해 들은 바로 회사는 별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물기 전에 직원들 입단속을 시켜서인지. 금방이라도 문을 닫을 것처럼 야단이던 직원들의 입과 뉴스 역시 잠잠했다.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잊히는 것처럼, 소문은 더 큰 소문으로 쉽게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사소한 곳에서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향미가 근무하는 연구실 출입을 위해서 이제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곳에 지문으로 통과할 수 있는 문이 하나 추가로 생겼다. 지문 등록 출입문이 그 어떤 것이든 새 나가게 하지 않겠다는 회사의 다짐이었다면, 늘어난 CCTV는 의심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회사의 경고였다. 위에 뒤에 옆에 그리고 앞에까지 있는 CCTV를 보면서 향미는 포토 부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아, 기분 별로야. CCTV를 보면서 향미는 매번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주 카메라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인섭 : 홍보팀 한 명씩 면담한 후에 홍보팀 이대리가 권고사직을 당했다나 봐.      


직원들의 면담이 이어졌다. 인섭이 물어온 정보에 의하면 면담은 문제시되는 직원을 솎아내겠다는 적극적인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곡식을 수확한 후 도리깨질로 알맹이를 털어내는 것처럼 직원들을 들쑤시고, 키질로 잡티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것처럼 직원들을 회사에서 내보내는 중이었다.

무철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을 거였다. 아니 무철은 이 모든 일을 직접 지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훔친 거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이렇게 하는 건가. 무철의 제안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한층 더 찜찜한 기분으로 옥상에서 내려와 연구실 자리에 앉은 향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웅희 부장의 호출이었다.  



이전 12화 배신으로 은혜를, 은혜를 배신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