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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Jun 05. 2024

배신으로 은혜를, 은혜를 배신으로

SM 물산은 무철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그룹이 보유한 많은 계열사 중 하나다. 큰어머니 집으로 가서 살게 된 후 무철은 아버지를 어쩌다 한 번씩 그것도 먼발치에서 스치듯 봤다. 무철도 그게 편했다. 그저 마주치지 않으려면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집에 산다는 것이 놀라웠다. 집이 크니까 그게 되네. 

아버지라. 

저 사람이 무철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건데. 아버지를 떠올리면 무철은 자신을 태어나게 한 다른 한 명을 떠올렸다. 다시 돌아가지 않을 그 집과 그 집에서 잠들어 있을 어머니 말이다. 


어머니라. 

잘 때도 집의 어느 한쪽 불은 꼭 켜두어야 할 만큼 겁이 많던, 비 오는 날이면 커다랗게 썬 감자와 호박을 넣고 수제비를 끓여주면서 수제비와 물수제비에 대해서 말하며 말갛게 웃던, 드라마도 뉴스도 아닌 예능 중에서도 낯선 나라로 떠나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만 주야장천 보면서 해외의 풍경과 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철이 자라면 저곳을 꼭 가볼 테니 나라 이름을 기억해 두라고 말하던 어머니라는 사람. 

무철은 어머니를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다달이 나오는 성적표는 마치 결재 문서처럼 큰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듯했고, 결재 후 업무 지시처럼 아버지의 말 중 일부는 큰어머니를 통해서 다시 무철에게 전해졌다.  


“수학 과외를 더 받으라고 하신다.”  

“석차를 올리기 위해 더 노력하라고 하신다.”  

“일등이라고 해서 넋 놓고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신다.” 


큰어머니를 통해 전해지는 말마따나 무철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다. 그게 무철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 편하게 사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해.’라는 말을 자주 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무철은 염치가 있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출근하라고 하신다.” 


SM 물산으로의 출근 역시 비슷했다. 아버지의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라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무철 역시 하나의 회사를 물려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잠시잠깐 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아버지의 회사 계열사를 누가 물려받았다고 텔레비전과 뉴스에서 떠들어댔으니까. 


“행여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무철이 네가 물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하신다. 평생직장 하나 가지고 된 거라고 보면 된다고 말이다.” 


여느 때처럼 하신다라는 말이 붙어있었지만 이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큰어머니의 뜻으로 읽혔다. 무철이라는 존재에 대한 미안함과 무철을 참아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아버지가 큰어머니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것. 아버지로부터 큰어머니에게 전해진 이번 결재 문서는 아버지 재산의 어느 한 귀퉁이도 무철의 것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큰어머니의 선언이자 그것에 대한 아버지의 확답이었다. 


큰어머니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애초에 무철은 아버지의 재산 중 어느 한 귀퉁이라도 자기 것이 될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했다.      


'흠집을 내고 싶다'

'흠집을 내고 말겠다'


내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라는 사람의 재산 한 귀퉁이라도 뜯어내거나 망가트려야지. 자신도 어머니를 배신한 주제에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엄마를 향한 염치는 영영 차릴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흠집을 내기 위해선 SM 물산을 탐이 나는 재산으로 만들어야 했다. 계열사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뿐 존재감이라곤 없는 SM 물산을 탐나는 재산으로 키우기 위해 무철은 지난 5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회사에 쏟아부었다.       


무철의 노력에 대한 결과이자 무철의 야심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여기 있다. 


[BR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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