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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May 22. 2024

무철과 향미

무색무취의 남자와 그저 취취취 뿐인 여자

그 옛날 구석기시대 인류도 이 정도로 필요한 것만 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은 동굴 벽에 그림이라도 그렸잖아? 커다란 거실 창을 등지고 놓여있는 소파에 앉으며 향미는 생각한다. 이 넓은 거실에 있는 거라곤 지금 향미가 앉아있는 소파와 벽 모서리에 놓여있는 기다란 스탠드 조명뿐이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주방도 상황은 비슷하다. 4인용 식탁과 물과 술뿐인 냉장고.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보다 고급스럽고 완벽한 살림살이를 들여놓을 수 있을 텐데. 하긴. 박무철이라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사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와 어울린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이 꼭 너 같네요, 박무철 상무"


옥상에서 향미가 이 부장에게 한 말은 회사에 빠른 속도로 퍼진 모양이다. 뭐 이런 게 말이 되나 싶지만 별게 아닌 것도 아니 별게 아닐수록 다 말이 되어 퍼져 나가는 곳이더라, 회사라는 곳은. 한동안 향미는 달걀 프라이도 해 먹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뜨거운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이슈의 한가운데 있었다. ‘통쾌한 복수극’에서부터 ‘하극상’까지 이 일을 두고 저마다 자기 위치와 관심사에 따라 떠들어댔고 결국 이 일은 박무철 상무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퇴근을 30분 앞둔 시간 무철의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향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가만히나 있을걸 괜히 설쳐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후회와 이까짓 일 가지고 퇴근을 30분 앞둔 시간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뒤섞였다. 무철의 사무실 앞으로 향하는 향미를 향해 몇 개의 눈알이 따라붙었고, 최신 소식을 퍼다 나르기 위한 급한 타자 소리가 향미의 귀를 울렸다.  


사람을 불러 놓고 무철은 한가하게 저녁 약속이 있느냐고 물었다. 고분고분하게 저녁 약속 유무에 대해 말해주고 싶지 않은 향미는 무철을 향해 그건 왜 묻느냐고 되물었다.      


"초밥 좋아합니까? 집 근처에 잘하는 데가 있는데. 어떻습니까?"      


향미는 군말 없이 무철을 따라나선 자신을 향해 초밥 때문이라고, 잘 나가는 회사 상무는 어떤 초밥을 먹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허세를 부렸지만,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솔직히 무철이 잘 아는 식당이 감자탕이었대도 아니 분식이었대도 향미는 따라나섰을 것 같다. 왜냐고? 향미는 박무철이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그는 또렷한 냄새가 없었다. 달콤하지도, 끈적하지도, 퀴퀴하지도, 알싸하지도, 산뜻하지도, 아니 그 어떤 또렷한 냄새도 나지 않는 이 사람은 뭐지? 호기심이 향미의 마음에 조금씩 쌓였다. 뜻밖이다 싶은 그의 제안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무철의 제안도, 초밥이라는 메뉴 뒤에 있을 이야기를 향한 향미의 호기심을 키웠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괜한 호기심 불러일으켜서 좋을 게 없을 테니 식당 앞에서 만나자고 하며 식당 주소와 연락처를 향미의 핸드폰으로 보내겠다는 말도 무철이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이웅희 부장은 개새끼죠. “


상대방을 향한 호감은 같은 사람을 욕할 때 시작되기도 한다. 향미의 경우는 그랬다. 무철이 이웅희 부장을 개새끼라고 말하는 순간 향미는 그를 향한 호감을 라일락 향기만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초밥을 맛있게 먹고 입을 싹 닫고 집으로 가는 대신 향미는 무철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갔다. 거절하기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네, 이 사람은. 대놓고 꼬시는 것도 아니고 징징대면서 엉겨 붙는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하지. 이번에도 향미는 무철이 궁금해서 손을 뿌리치는 대신 마주 잡고 무철과 나란히 집을 향해 걸었다.  


"당신은 냄새가 없어."


무철의 침대에 널브러진 향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를 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건 사실이지만, 알몸 구석구석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자 향미는 슬그머니 겁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자신이 맡을 수 없는 냄새가 있다는 게. 아니면 [BREATH]처럼 냄새가 나지 않게 하는 제품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나. 향미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무철은 손을 뻗어 향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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