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을 떠는 건 하나도 없이 평소와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 무철은 전화로 약속을 잡을 때도 입을 옷을 고르면서도 약속 장소를 향해 운전을 하면서도 그 생각뿐이다. 어느 것도 평소와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이 만남을 머릿속으로 그릴 때부터 무철이 반복했던 다짐이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날 자신은 조금의 호들갑도 떨지 않을 것이다. 증오라는 감정에 몸서리를 치지도 않고, 슬며시 고개를 쳐들지도 모르는 연민이라는 감정도 모른 척하리라. 아버지라는 사람과 관계된 그 모든 일을 무철은 그저 숫자처럼 거짓이 없고 계산 가능한 것으로 대할 생각이다.
“이번 일을 두고 아버지가 한번 만났으면 하신다.”
그래서였다. 큰어머니가 전화로 이 말을 전했을 때 무철은 그다지 들뜨지 않았다.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니까. 아버지라는 사람의 재산에 흠집을 내기 위한 시작.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무장이나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기대가 아닌 지극히 고요한 평범함이다. 노트북 화면에 질서 정연하게 놓인 숫자에 무철은 자신의 계획을 겹친다.
이 부장의 양심 없는 양심 고백 후 [BREATH]를 향한 찬반론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무철의 기대 이상으로 이 부장이 역할을 잘해줬다. 행동의 나침반이 나쁜 쪽으로 쏠려있는 사람이 있다. 이 부장을 행동하게 하는 건 언제나 긍정의 언어나 칭찬이 아닌 부정의 언어 그리고 질타였다. 직원들과의 면담 자료를 들이밀고 이 부장에게 책임을 물었을 때 이 부장은 발끈하기보다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제 발로 회사를 걸어 나간 후 양심 고백을 하라는 무철의 지시에 이 부장의 눈은 호기심으로 번들거렸다. 무철이 하려고 하는 일 그리고 목표에 대해 이 부장은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과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일에 동참한다는 것에 그는 흥분했다. 그 일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하겠다는 무철의 말에 이 부장은 헤벌쭉 웃었다. 이 부장의 미소와 거기 담긴 그의 텁텁한 욕망이 무철의 손에 닿는 듯했다. 무철이 추가로 지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 부장은 신이 나서 다음 일을 해냈다. 기자회견문을 작성하고 출연할 뉴스를 고르고 화면에 등장할 자신의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오늘도 비슷한 거 올라와서 테스트하는데 슬슬 재미없어지려고 함"
주차장에 도착한 무철은 향미의 메시지를 흘끗 본 후 답장을 하려다 주춤한다. 이 부장과 다른 쪽에서 무철의 계획을 돕고 있는 향미.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존재. 목표를 향해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바로 지금, 무철은 향미에게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의 목적과 결과에 대해 말할지 당초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향미가 저절로 알게 될 때까지 그저 두고 볼지 고민하고 있다. 한번 배신한 놈이 두 번이라고 배신하지 못할까. 무철은 자신의 배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답지 않게 배신의 순간을 자꾸만 미루고 있다. 오늘이 아닌 내일로, 내일이 되면 모레로, 배신을 미루면서 무철은 향미의 곁에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얼마 안 남았어. 곧 재미있어질 거야."
향미에게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무철이 문을 향해 걷는다. 저 문 뒤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라는 사람. 이제 그를 만날 차례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무철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과 몸짓으로 문을 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