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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Dec 01. 2022

손님

12월 1일 내가 태어난 날

지금 내 앞에 있는 계집아이는 사내아이여야 했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은 며느리는 더 이상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며느리를 아들은 하나보다는 둘이 있어야 든든하다며 달래고 구슬렸다. 내 말을 계속 듣고 있는 게 고욕이었던지 사십을 바라보는 며느리에게 용케 아이가 들어섰다.


별 탈 없이 며느리의 배는 불러왔다. 첫 번째 임신에서는 며느리가 고생을 좀 했다. 결국 아까운 아이를 잃었다. 임신하면 자연스레 불러오는 배보다 더 빠르고 더 크게 손과 발이 부어오르던 며느리는 결국 하혈을 했다. 핏기 없는 며느리와 그 옆에 놀란 얼굴을 하고 뻣뻣이 굳어 있던 아들을 데리고 시내 병원으로 향했다. 원래 대로라면 내 손으로 받아냈을 첫 번째 손주를 그렇게 잃었다. 두 번째는 며느리도 아들도 겁을 내서 처음부터 병원에서 낳을 생각을 했다. 내가 사는 동네 어떨 때는 옆 동네까지 아이를 받으러 다녔는데 정작 나의 첫 손주는 내 손으로 받아보질 못했다. 병원 유리 너머로 다른 아이들보다 단연 큰 첫 손주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내 또래의 여자가 서더니 불쑥 묻는다.

“손자 보셨나 봐요?”

그 여자를 마주 보며 말했다.  

“손자는 아니고 손녀 봤어요. 아들네 첫 앱니다.“

내 말을 들은 여자는 이상한 말을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놈의 계집애.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봐요 그래?”

그 날것 그대로의 감정과 그걸 숨길 줄도 모르는 뻔뻔함이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 뭐, 태어난 아이를 계집애라고 버리기라고 할 건가. 다음에 아들 낳으면 되는 거지. 그제야 첫 손주가 아들이었으면 내가 지금보다 더 기뻤을지 궁금했다. 생기지도 않은 일에 대한 감정과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저울에 올릴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뒤돌아 성큼성큼 어딘가로 향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며느리가 연이어 딸을 낳으면 저렇게 염치없는 사람이 되려나.

첫 손녀 이후 손자가 태어났고 그리고 손녀가 태어났다. 하나뿐인 손자를 보면서 마음에 들어차는 감정을 느끼며 상투적인 표현이 실은 정확한 묘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이 말을 눈으로 배로 생생히 느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지. 기왕이면 아들이 둘이 있으면 싶었다. 유난히 극성스럽고 나대던 누이 아래서 주눅이 들어 살던 하나뿐인 내 아들 옆에 아들 둘이 서 있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면 외롭게 혼자 큰 내 아들이 든든하지 않을까. 그 장면을 상상하니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조만간 첫서리가 내리겠다 싶은 날 저녁 준비를 하던 며느리가 배가 아프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배가 아래로 내려오는 모양을 보고 얼마 안 남았구나 싶긴 했다. 근처에 사는 딸을 급히 불러 사랑 아궁이에 불을 지피라고 했다. 이미 누렇게 되어있는 장판 바닥이 거무스름해질 만큼 뜨겁게, 공기가 훈훈해질 때까지 아궁이에 나무를 넣으라고 시켰다. 힘겹게 바닥에 누워 자세를 잡는 며느리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수건으로 대충 닦아낸 작디작은 아이는 계집애였다. 나의 아들은 아들이 둘이 아니라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둔 아버지가 되었다. 아깝지만 어쩌겠나. 갓 태어난 아기에게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여러 아이를 받아 봤지만 그중 가장 작다. 이래서 사람 구실 하겠나, 남들보다 덜 가지고 태어난 구석은 없나 골고루 살펴봤다. 이마에 흐리지만 넓적한 점이 있다. 계집애 얼굴에 점이라니 아쉽게 됐다. 나중에 이걸 뺀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해야지. 점 하나로 운명이 바뀌는 건데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걸 너무 우습게 생각한다. 안 좋다는 건 피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라고 하면서 키 울테다.

한참을 울었는데 지치지도 않는지 울음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손바닥 두 개 붙인 것만 한 크기일까 싶은 그 작은 몸집에서 어쩜 이렇게 큰 울음이 나오는지. 크고 긴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안심이 되었다. 사람 구실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죽지는 않겠구나, 살겠구나.


낳자마자 아이에겐 ‘손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꼭 사람들을 데리고 집으로 기어 들어오던 아들은 산달이 다 된 부인이 아이를 낳건 말건 아이가 태어나던 날도 사람들을 우르르 몰고 왔다. 집으로 들어온 그때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나 보다. 집으로 온 일행 중에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는지 몰랐던 사람 하나가 아들에게 물었다.

“애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으면 술자리가 일찍 파할까 싶었는지 아니면 그저 쑥스러워서 그랬는지 아들이 둘러댔다.

“손님이 왔어. 아이를 데리고 손님이.”  

그때부터 이 아이는 아들에 친구들한테 ‘손님’이라 불렸다.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건넸다.

“손님, 어디 가니?”

“손님, 그렇게 빨리 걸어가다 넘어질라.”

옆 동네서 들른 사람도 말을 보탰다.

“네가 동주네 손님이구나?”  

좀 자란 후에 자기를 손님이라 부를 때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에게 얘기를 들려줬더니 듣기 좋았는지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아이는 유난히 작은 몸짓에 병치레도 잦아서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그 고비마다 나는 아이의 첫울음을, 그 길고 큰 울음을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디게 자라지만 괜찮을 거다, 결국 살아낼 거다.

아장아장 걸어서 나에게 오는 아이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 나갔다.   

“아이고, 이게 아들이어야 했는데.”  

첫 손주 때 병원 유리문 앞에서 만난 그 사람처럼 염치가 없어졌구나,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말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내 무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아이. 아이를 안아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 단단히 감싸 안는다.

손님처럼 온 내 마지막 손녀, 계집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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