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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민정 Jan 29. 2018

베셀 반 데어 코크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을 읽고 

지난 한 해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2009-2013년까지 4년 간의 중학교 영어교사 생활, 그 후 3년 간 영어학습 교재와 커리큘럼 개발을 하며, 학습자의 성장 단계에 맞는 커리큘럼과 수업을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렇게 개발한 프로그램을 실제로 수업했을 때 현장의 반응은 달랐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학습 내용보다는 정서적인 안정감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컸다. 무엇보다 최근 3년간 영어 조기 교육으로 인해 학습 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많이 가르치게 되면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왜 학습이 잘 일어나지 못하는지, 반대로 정서적인 안정감이 있을 때 손실된 학습능력을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해 1970년대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연구해 온 의학박사, 베셀 반 데어 콜크(Bessel Van Der Kolk)가 그간의 치료 및 연구 내용을 집대성한 '몸은 기억한다(The Body Keeps the Score)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을 읽고 정서적 환경의 중요성과 앞으로 과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은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뇌와 그로 인한 반응과 행동, 트라우마성 발달장애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의사소통은 최대 90퍼센트 정도 우반구가 담당하는 비언어적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안전한 느낌,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면 뇌는 탐구와 놀이, 협력 기능이 특화되고 겁에 질리거나 거부당했다고 느끼면 공포와 버려진 기분을 관리하는 기능이 발달한다.

ADHD 아이들은 이성적 뇌가 정서적 뇌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여 실행 능력이 떨어진다. 이들의 뇌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다.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은 겉보기에 가만히 앉아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동안 뮤지컬이나 연극, 노래하며 춤추기, 그림 그리기 활동을 통한 영어 수업에서 아이들이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에 대한 근거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놀면 신체가 서로 조율되는 느낌을 받고 유대감과 즐거움을 경험한다. 즉흥 연주도 사람들이 재미와 탐구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서로 연결되도록 도와주는 신기한 방법 중 하나다. 


또한 이 책에서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런 원리를 교육에 적용해볼 수 있는 것이 많다. 특히 컴퓨터 게임과 비슷한 '뉴로 피드백'이라는 뇌를 안정화시키는 프로그램은 "다른 사람과 마주 보고 대화하면서 상대방 얼굴을 쳐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이를 면대면으로 학습자와 상호작용 하는 데 적용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춤, 음악, 미술 등 예술과 결합한 영어 학습 활동이, 재미 없고 정적인 활동을 오래 지속할 수 없는 어린 학습자에게 매우 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영어학습만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많은데, 이 책에 소개된 뉴욕시에서 운영하는 '가능성 프로젝트'와 '법정에 간 셰익스피어 프로그램'에서 프로젝트 중심 수업과 예술 활동과 연계한 언어교육에 대한 희망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뉴욕시 '가능성 프로젝트'는 위탁보호를 받는 청소년들을 위한 연극 프로그램으로 배우들이 9개월 동안 참가자들과 매주 세 시간씩 만나 뮤지컬 한 편을 함께 쓰고, 수백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한다. '법정에 간 셰익스피어 프로그램'은 싸움, 음주, 절도, 재산권 관련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인데, 셰익스피어 희곡 중 한편을 압축한 줄거리대로 직접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친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며 말로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아이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갈등 장면에서 자신의 감정과 신체적 힘을 표현하며 연기하며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은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법을 익히는 학습자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은 자신이 강한 존재임을 보여 주고 싶은 의미도 있겠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기분이 어떤지 전달할 수 있는 다른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욕설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의 풍성함과 잠재성을 알고 나면 가슴 깊이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처음 폈을 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한번에 다 읽어 내렸다. 책의 닫는 말에서 내가 왜 이 책을 읽었는지, 무엇을 찾고 싶었는지 저자가 내 마음을 그대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많은 교사가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대는 아이들이 교실에 가득 차 있으면 수업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힘겨운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교사와 학교도 아이들이 트라우마에 너무 심각하게 시달리며 공부할 수 없는 모습을 보면 좌절하고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교사가 아이의 행동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한, 이 아이들의 시험 점수를 올리려고 애써 본들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다행히 트라우마에 중점을 둔 치료법의 기본 원칙들은 매일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적용할 수 있으므로 이를 이용해 학교 전체의 문화를 바꿔 놓는 접근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것이 올해면 10년째이다. 수능을 마치자마자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을 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면 반평생을 영어를 가르쳐왔다. 그러나 교육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시원하게 답할 수 없었다. 특히 작년에는 내가 지금까지 맞다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무너지고 다시 새로 해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혼란이 오면서, 그나마 잘못된 일은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시간이 주는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언어에는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 4가지 기능이 있다. 듣기에서는 누군가의 생각을 경청하고 핵심을 파악하는 방법을, 읽기에서는 문자를 해독해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를, 말하기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기를, 쓰기에서는 정제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 새로운 한 해를 이런 생각으로 맞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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