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뭘 하기가 좋다. 놓여나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가. 의자 위에 한쪽 발을 걸치고 과자를 아짝거리며 논다. 하는 짓은 단순하다. 북마크에 넣어둔 리스트를 기웃거리면서 구경한다. 블로그와 매거진, 그간 놓쳤던 영화 리뷰와 소설 프리뷰를 읽는다. 어쩜 세상에는 이토록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을까. 기가 죽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마음이 촉촉해진다. 예전에는 자기 속사정을 한없이 늘어놓는 글을 싫어했지만, 솟아오르는 자의식을 제 나름의 미학적 판단으로 꾸며내는 사람들이 어여뻐 보인다. 아마 거기서 일종의 희망을 보는 것 같다. 나도 내 사연을 잘 팔아서 저 정도는 쓸 수 있겠지 싶은 거다. 서른여섯 해를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며 세상을 겪어왔건만 이제는 과거의 경험과 그 경험을 토대로 한 상상 없이는 하루하루 배겨내지를 못한다. 밤엔 아무도 없으니 내가 잘 보이고, 어떤 상상이든 간섭하는 이가 없어 속이 편하다. 내게 밤은 자의식 투성이다.
무수한 작가들이 나 같은 밤의 추종자를 위해 글을 써준다. 지나치게 촉촉한 글을 피한다. 뽀송뽀송한 띠지를 두르고 뻑적지근한 표지를 꾸민 책은 우선 의심부터 하고 본다. 책이 아니라 약을 파는 것 같아서 싫다. 위로네 공감이니 하는 말로 지갑을 여는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 서점엔 쉬운 위로가 판을 친다. 제대로 묻지도 않고 무턱대고 괜찮다는 식이다. 오히려 난 세상은 더 나아질 게 없다고 말하는 책을 더 믿는다. 비관 속엔 적어도 헛된 희망은 없으니까. 사람을 속이는 긍정주의의 덫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내 말이 무슨 얘기인 줄 알겠지. 내 집 거실에는 그래서 비관주의자들의 책이 연탄처럼 쌓여있다. 밤에 그걸 하나씩 때서 불을 지핀다. 성격 나쁜 것들의 암담한 소리를 진짜배기로 여기고 따른다. 내가 병적인 구석이 좀 있나. 난 비관주의자의 미덕을 따른다. 아무런 기대 없이 세상을 대하다 보면 의외로 작은 일에도 기쁨을 느낀다. 요행이지만 영화도 책도 기대 없이 봐야 더 재미난 법이잖나. 무턱대고 위로를 받으면 불행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자세를 바짝 낮추고 동공에 힘을 풀고 냉소적인 웃음을 짓다 보면 어깨에 뽕만 가득한 긍정주의자들이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꼴은 피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밤은 내게 있어 모름지기 가망 없음이다.
읽은 책 보다 읽어야 할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건 일상이 숙제와 같다는 의미다. 술집에서 사람들과 바삐 떠들 때도, 사랑하는 이와 부둥켜안고 침대를 뒹굴 때도 아직 못다 한 숙제를 떠올리며 불안해한다. 그래서 켜켜이 쌓인 책더미는 낭만보다는 피로에 가깝다. 등만 대면 잠이 오는데 책까지 펴면 두 눈이 남아날 리 없다. 칠흑 같은 밤에 얕은 숨을 내쉬며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쉽지가 않다. 서른 후반이 되니 일에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내 옆자리에 앉은 상사는 점점 더 자비 없이 군다. 그래도 갸륵한 침묵 속에서 한 장 한 장 읽어내야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감이 온다. 특히 어려운 책 읽을 때가 더 그렇다. 내가 믿고 사는 건 불가해한 세상에 한 걸음 다가가는 거니까. 그래야 하기 싫은 일을 하러 출근할 때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까지 용을 쓰며 읽어야 하네. 그게 맞네. 지적 허영을 무기 삼아 기어이 난 끝을 본다. 한 달에 독서 모임 6개를 때리고, 일주일에 한 개씩 글을 토해낸다. 분수에 넘치는 일정을 소화하고 필요 이상의 책임감을 느끼고 모임을 진행한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넘어, 오기에 가까운 겉치레다. 졸음을 참아가며 독서를 하는 밤은 허영임이 틀림없다.
밤을 다 탕진하고 나면 아침이 끔찍하다. 잠이 모자라는 걸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을 것 같다. 짜증이 솟구치고 눈이 무거워서 자꾸만 미간을 구긴다. 출근은 낭만의 종식이라서 일말의 미소도 없다. 출근만 없으면 괜찮은 삶이라는 농담은 그냥 흘려 넘길만한 말이 아니다. 출근은 지난 새벽의 노고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한다. 아침은 밤의 적이고, 밤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삶의 양면성과 같다. 밤에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낮에 빚쟁이에 시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난 수용소의 포로처럼 내 몫을 커피를 받아 들고 파티션 아래에서 윗분의 자비를 구한다. 불에 탄 잔해로 만든 것처럼 시커먼 커피를 꿀꺽꿀꺽 넘기면서 쉽지 않을 회의를 각오한다. 모든 걸 수면 부족 탓으로 돌리는 내 모습은 센티멘털 대미지라고 불러야 하나. 어쩌면 진짜 원인은 잠이 아닐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잠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난 밤을 우러르다 밤을 배신하며 도섭질 하는 침소봉대로 마무리한다. 이러니 내게 밤은 핑곗거리다.
내 브런치를 열어보면 밤에 바치는 러브레터로 빼곡하다. 새벽에 쓴 글이라 감정 과잉이 도드라지고, 형용사와 부사가 지뢰처럼 깔려서 주워 담을 의욕도 나지 않는다. 다 때려치우고 침대에 누우면 카페인 과다 복용의 여파로 환각에 빠진다. 천장을 스크린 삼아 앳된 기억을 떠올리며 논다. 천장을 보며 한 생각에 몰두한다. 마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소행성처럼 꽂히는 뭔가를 자꾸만 끄집어낸다. 지극히 미시적인 감각에 몰두하느라 기운을 다 빼버린다. 그 시간이 내겐 무척 중요하다. 내 나름의 정화 작용을 거친다는 의미에서 천장에는 좋은 빛이 있다. 내게 특별히 좋은 빛이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노총각의 공상처럼 보일 광경이 내게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시곗바늘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의식하기 시작하면 기억이 모든 순간을 지배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작은 미동마저 감지해내는 과정이다.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속았다는 괘씸함과 대체 나는 얼마나 멍청한 것인가라는 자책감의 연속이다. 나와는 달리 꽤 잘살고 있는 그는 마치 불침번처럼 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나의 밤은 쓸모없다.
잠을 이루지 못해 창밖에 동이 트는 걸 볼 때가 있다. 이불을 대충 개고 화장실로 가서 '졸졸'에 가까운 소변 줄기를 본다. 시냇물도 아니고 '졸졸'이라니. 밤새 눅눅해진 뇌가 온몸에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이제는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씻고 나서야 한다. 추워 죽겠는데 졸리기까지 한 상태로 차에 오른다. 사람은 하루 8시간은 자야 한다는데 이게 무슨 짓인지. 나의 밤은 만성 수면 부족이다.
밤은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른 것처럼 다시 시작된다. 오늘도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감탄할 줄 아는 서정시인에 빙의했다. 경직된 미간이 풀리고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면서 가슴속에 숨어 있던 '소년성'이 솟아올랐다. 밤에 쓴 글은 다음 날이면 끔찍하겠지만, 그렇다고 낮에 글이 써지는 건 아니니 어쨌건 난 밤에 쓸 수밖에 없다. 낮에는 정신 차리고 깎고 다듬어서 퇴고라도 해야지. 밤의 부끄러움을 낮에 만회하는 꼴이다. 허송세월 하는 시인의 너저분한 글을 편집자의 마인드로 고쳐 잡는 날렵한 손길이다. 그래서 내게 밤은 언제까지나 초고에 불과하다.
밤의 시작은 언제일까. 감정적으로는 퇴근 후지만, 감성적으로는 타들어 가는 노을을 보는 순간부터다. 그 육개장 같은 빛깔을 보며 회사 언덕길을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쉬이 열리고 몸은 돼지 수육처럼 노곤해진다. 어제도 집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살짝 눈을 감고 저무는 겨울을 느꼈다. 영하의 날씨가 무색하게 내 몸은 느슨한 온기를 호출했다. 뉴스에서는 한파라고 난리였지만 난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일러를 25도까지 올리고 뜨신 밤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밤의 끝은 언제이려나. 출근일까. 잠드는 시점일까. 아무래도 난 야식을 먹을 때 밤이 소멸하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밤은 허기 없이 지속할 수 없다.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망한다. 라면을 끓여서 후후 부는 순간에는 서정시인도 붓을 꺾는다. 애석하게도 밤은 배고픔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