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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9. 2023

같이 헬스한 사이야

Ver. 2.0

ᅠ 최근 홍제동에 있는 한 호텔로 출장을 갔다가 몇 해 전 헬스장을 같이 다녔던 동료와 마주쳤다. 이름이 뭐더라. 아주 반갑게 손을 붙잡고 인사를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거리끼는 게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되도록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면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디서 일하던 누구였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헬스장에서 친했던 사람은 운동복을 벗으면 영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 예. 지금 시작하나 봐요. 이따 다시 얘기하시죠. 여기 점심 맛있데요.' 눈을 찡긋하고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니 코 주변에 뾰족하게 부어오른 작은 부스럼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역시 전날 술을 잔뜩 마신 모양이었다. 그래 저 붉은 얼굴.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밤만 되면 술을 마시러 간다고 했지. 자기는 술 마시려고 운동한다고. 음주가 삶의 유일한 재미라는 듯이 과장하며 말했던 사람. 그래, 넉살 좋고 목소리가 걸걸했던 저 인간 이름이 뭐더라.


 ᅠ세미나에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다.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뷔페로 제공되는 점심시간만 기다리다 보니 회의장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전날부터 도착해서 숙소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온 사람도 보였다. 아침부터 열차를 탄 나도 다르지 않아서 회의장을 살짝 빠져나와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머신 앞에 섰다. 뾰루지를 열심히 긁던 그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굴에 다 티가 난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아닌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칙칙하고 부스스한 머리도 한몫 거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양복도 멀끔하고 운동으로 가꾼 몸매도 날렵했는데 그 붓기 때문에 사람이 속돼 보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가오며 물었다. '요즘도 운동 열심히 하나 봐. 팔뚝이 장난 아닌데. 난 일이 바빠서 잘 못 간다.' 나는 긴가민가함을 떨치지 못하고 그를 대했다. 누군지 생각은 잘 안 나지만 그래도 꽤 친한 사이였던 게 확실했다. 같이 체육관을 다녔단 말이지. '저도 바빠서 하는 둥 마는 둥 해요. 딱 봐도 운동 계속하신 모양인데요. 어깨 프레임 넓어진 거 봐.’ 난 헬스인이 주고받는 안부 인사를 하며 교묘하게 호칭을 생략했다. 대화하다 보면 우리 관계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난 요새도 애들이랑 열심히 먹고 마시려고 러닝머신만 기웃거려.' 그 닭살이 돋는 너스레를 지켜보고 있으니, 뇌에도 닭살이 돋듯 형 이름이 떠올랐다. 태주 형, 그래 태주 형이다. 연이어 형 친구들 얼굴까지 차츰 다 떠올랐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집단 강도 용의자로 나올 법한 우락부락한 그 얼굴들.


 ᅠ태주 형과 난 체격은 물론이고 운동 강도나 헬스장 가는 시간까지 엇비슷해서 자연스럽게 합을 맞춰 운동했다. 난 늘 혼자 운동했는데 성격 좋은 태주 형은 느닷없이 내 보조를 해주면서 가까워졌다. 우린 환상의 짝꿍처럼 서로 잡아주고 끌어주고 격려도 하고 빨가벗고 샤워까지 같이했지만, 운동 빼고는 잘 모르는 채 지냈다. 회사 헬스장을 이용하다 보니 일로 엮이거나 불편해질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서로 회사 얘기는 피했던 것 같다. 사실 헬스장에서는 운동 빼고는 그다지 할 얘기가 없긴 하다. 거친 숨이 오가고 근육의 자극 지점을 찾아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요즘 보는 헬스 유튜버 얘기라든지 새로 나온 프로틴이나 크레아틴 제품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헬스 문화 안에서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서로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냥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린 운동만 열심히 하고 헤어지면 그만인 사이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운동을 하고 기분 좋게 밖을 나서는데 태주 형이 자기 친구들이랑 맥주를 마시러 가니 같이하자고 청했다. 삼각지역 근처는 오르막에 있어서 야경이 아름다운 가게가 많았다. 평소 술집과는 인연이 없어서 가보지 못하던 차에 솔깃했다. 왠지 그날 밤은 그냥 집에 가기 싫었다. 날씨도 좋고 오늘 입고 온 셔츠도 몸에 착 붙은 게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밤이었다. '가자니까, 민진아. 지금 들어가면 모해. 이 날씨에 집구석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냐. 운동하고 바로 숙소로 가게 네가 체대생이냐.' 축축하게 젖은 태주 형의 머리가 흉측하게 느끼했지만, 난 손사래를 치면서도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시죠.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따라갈게요.’


 ᅠ3층 야외 테라스 술집에 앉아 경치를 보면서 멍을 때리던 내게 태주 형은 묻지도 않고 맥주 한 잔을 건넸다. 오 분 단위로 속속 태주 형 친구가 도착했는데 죄다 비슷하게 입고 비슷하게 생겨서 재밌었다. 가다마이에 큼지막한 시계, 명품으로 보이는 지갑까지. 내가 사회에서 한몫 거들고 산다는 티를 내려고 열심이었다. 어쩌면 옆자리에 추파라도 보내려고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복덕방 사장처럼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유부남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매주 보는 사이라고 했는데 마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이십 년 만에 상봉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인사를 나눴다. 내가 싫어하는 의리, 남자의 우정, 해병대 전우회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아 괜히 나왔네.’ 내게도 반갑다며 다짜고짜 악수와 청하기가 무섭게 격한 포옹을 했는데 거부감이 들어서 본능적으로 바닥에 메칠 뻔했다.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태주 형은 잠시 생각하더니 ‘같이 헬스하는 사이야'라고 간단하게 말하더니 뭔가 부족했는지 '땀을 나눈 사이지'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땀 나누면 다 준거네.’ 그들은 토크쇼 진행자처럼 나와 통성명을 나눈 후부터는 바로 농담 따먹기와 먹고사는 문제 사이를 오가는 대화로 뛰어들었다. 곧 마흔에 접어드는 양반이 큰 맥주잔을 기울이고 어린애처럼 발랄하게 음담패설을 뱉고 떠드는 게 우스웠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들은 산악동호회에서 만나서 이어져 온 모임이었다. 비록 지금은 산이 사라지고 술만 남았지만, 종종 여행도 가고 하는 모양이었다. 친목회 기조는 단순했다. 세상은 온통 다 재밌으며, 매사 모든 게 긍정할 것 투성이라는 식이었다. 별거 아닌 농담에도 자지러지게 웃고 좀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별거 아니라고 술잔을 부딪치며 다 잊자고 외치는 긍정왕들의 잔치였다. 처음에 술을 홀짝이던 나는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덩달아 맥주를 따라 마셨다. 전에는 없는 일이었다. 에일이랑 라거를 오가면서 예상외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아니, 그것보다는 그들이 가진 초긍정의 세계가 나를 흥분시켰다. 난 긍정을 애써 부정하는 비관주의자인데, 그들의 자화자찬은 삶을 조금 더 낫게 살아보려는 허세로 보여서 밉지 않았다. 힘든 일을 하고 운동까지 고되게 마치고 와서는 오늘 밤이 너무 아름답다고 울부짖는 하이에나들이 내 눈에는 귀여웠다. 난 그렇게 그날로 친목회 속 막내가 되었다.


 ᅠ언젠가 한 번은 친목회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성대 형이 자기 집에 나를 초대했다. 성대 형은 태주 형보다 술은 멀리하고 운동은 지나치게 많이 하는 타입이라서 나와 잘 맞았다. 나는 운동 잘하고 몸이 멋지면 무조건 호감을 품는데 성대 형은 그걸 넘어서서 생존 전문가 베어 그릴스 같은 이미지였다. 형 역시 베어 그릴스처럼 특전사 출신에 험하다 하는 산은 죄다 타고 다니는 모험가 기질이 있었다. 언젠가는 히말라야 고봉을 정복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헬스에 진심이었다. 베어 그릴스의 유행어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입니다”처럼 성대 형도 가방에 닭가슴살 팩을 잔뜩 넣고 다니면서 매일 헬스를 했다. 베어 그릴스와 차이가 있다면 책을 어찌나 많이 읽는지 함께 대하고 있으면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 자주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알파메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난 성대 형과 몇 번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가 나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라는 걸 알아봤다. 난 형의 제안에 군말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ᅠ성대 형 집이 당산 쪽에 있었는데, 십 년은 된 다가구 오피스텔이었다. 건물은 더없이 깨끗했지만, 녹색 매트가 깔린 복도는 낡고 허름했다. 문자에 적힌 대로 난 901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다시 한번 눌렀다. 집 안에서 정체불명의 음악 소리가 쿵쾅거렸다. 저녁 7시인데 벌써 술을 마시면서 노는 모양이었다. 난 셔츠 주름을 펴고 머리를 위로 넘기면서 조금 긴장한 걸 느꼈다. 난 사람 만나는 자리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날만큼은 노는 자리에 익숙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싶었다. 내가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가 왜 그런 낯설고 어색한 자리에 참석했는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난 너무 오랫동안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집단과 멀어져 있었다. 소속감 없는 삶이 길어졌다. 학교에서도 거의 외톨이였고, 인생은 어느 시점부터 내게 둘 이상의 친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내 성격대로라면 금요일 밤은 속 편히 커피나 마시면서 영화나 보면 장땡인데, 난 뭔가에 홀려서 골격근 냄새가 풀풀 나는 모임에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 옷까지 차려입고 당산역에 왔다.


ᅠ 음악 소리에 초인종이 묻히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초인종을 더 길게 눌렀다. 안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집 안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 생기 있는 목소리를 지닌 분이었다. 성대 형이 평소에 얘기했던 여자친구로 보였다. 언뜻 봐도 성대 형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다. 집 안에서 웃으며 고릴라 같은 목소리로 태주 형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진이 왔냐." 여자가 바로 표정을 풀더니 말했다. "어서 오세요. 지금 배달한 거 다 와서 막 먹으려던 참이에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어색함을 숨기며 삐죽 대며 들어가는데 아뿔싸 했다. 퍼뜩 처음 남의 집에 가는데 뭐라도 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놀러 가 본 적이 없다 보니 별생각이 없었다. 뻘쭘하게 들어가서 소파에 앉으려는데 성대 형이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올 때까지 계속 네 얘기했다. 네가 브런치에 쓴 글이 좋다고 다들 난리네. 너 책 내도 되겠더라. 일도 하고 운동까지 그렇게 하면서 언제 글까지 썼냐." 평소 내 글에 관심이 없었던 태주 형도 거들었다. '쟤는 운동하면 바로 책 싸 들고 집에 가요. 지가 무슨 선비인 줄 안다니까.' 성대 형 여자 친구도 칭찬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몸도 좋은데 글까지 잘 쓴다고요?" 나에 관해 뭘 안다고 난리지. 비꼬는 듯한 말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환대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민망해서 그냥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눙쳤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말했다. '두 분이 더 부러워요. 저보다 어려 보이시잖아요. 진짜 운동을 해야 관리가 된다는 걸 두 분 보면서 느껴요.' 난 도시 태생으로 누군가가 칭찬을 하면 바로 칭찬으로 갚아줘야 한다는 걸 공식처럼 들으며 자랐다. 교과서는 틀리지 않았다. 성대 형은 여자 친구를 바라보며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ᅠ다들 날 둘러싼 채 호감을 품고 말을 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쪽 다리에 한 손을 올리고 소파에 기댄 채 맥주를 홀짝이던 성대 형은 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울릴 수 있도록 이끌어줬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모임에 가든 리더를 찾는 버릇이 있는데, 누가 봐도 이 모임 주축은 성대 형이었다. 성대 형은 내가 느끼기에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주목받고 호감을 사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 나는 기질에 가까웠다. 그건 내가 수컷들 사이에서 평생 누려보지 못한 특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내가 왜 먹지도 않는 술 모임에 이렇게 참석하고 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서 호감을 품고 내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상황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고, 그건 다 성대 형 의도로 보였다. 그는 나를 끼워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난 주목받는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날 예상치 못한 환대가 신선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정중하면서 친근한 태도로 행동했다. 대화에 거리낌 없이 끼어들고 지치지 않고 유머를 던졌다.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고는 나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


ᅠ술자리가 점차 무르익어 갔다. 성대 형은 우리를 위해 계속 배달 음식을 시켰다. 작은 오피스텔 벽에는 형이 등산할 때 쓰는 산악용 장비가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우린 보드게임도 하고 DVD도 보면서 놀았다. 성대 형에게는 영국 배낭여행에 관해 물었고, 성대 형 애인에게는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다른 형들도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태주 형은 바쁜 일이 있는지 베란다로 나가서 한참 동안 담배를 피우며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신경이 쓰였는지 성대 형이 태주 형에게 이런저런 농담을 던졌는데 어쩐지 시큰둥했다. 얼마 못 가 태주 형은 담배를 산다고 편의점에 가서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난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입이 아플 정도로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열 시 가까이 먹고 마시다가 2차로 오피스텔 1층에 있는 투다리로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꼬치구이에 환장하는 나는 신이 나서 짐을 챙기는데 태주 형 생각이 났다. 성대 형이 말했다.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뭐 또 삐진 거 있나.' 나도 뭔가 이상해서 짐을 챙기고 카톡을 했다. '형한테 전화 좀 해볼게요.' 성대 형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되뇌었다. '걱정하지 마. 가끔 이래.' 나는 상기된 얼굴로 급히 1층 세븐일레븐을 찾았다. 편의점 앞에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태주 형이 보였다. 편의점 앞 테라스에 앉아서 왼쪽 발을 의자에 올리고 몸을 뒤로 잔뜩 젖히고 있었다. '형, 모해요. 지금 다들 2차 가는데, 어서 가요. 무슨 일 있어요?' 그는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난 집에 가게.'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오늘 컨디션이 별로네.' 딱 봐도 기분이 상한 걸 알 수 있었다. 그 유쾌한 형이 이렇게 시무룩하다니. 난 별생각이 다 들었다. 여자친구랑 싸웠나. 아니면 성대 형이랑 싸웠나.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나. 난 왜 눈치를 채지 못했지.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흔들더니 택시를 잡아탔다. 경기도 택시였다. 난 형이 경기도에 사는지도 몰랐다.


ᅠ그날 이후로 영문도 모른 채 점점 태주 형과 멀어졌다. 몇 번 더 성대 형을 비롯한 친목회 사람들과 만나긴 했지만 태주 형과는 알맹이 없는 얘기만 했다. 형은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했고, 헬스장에서 마주쳐도 몸이 안 좋다며 다른 운동을 했다. 얼마 못 가 태주 형이 아예 헬스장을 안 나왔다. 자주 하던 톡도 서먹해졌다. 그날 이후로 친목 모임에도 날 초대하지 않았다. 따로 성대 형에게 연락해 볼까 생각했지만, 왠지 태주 형을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 그만뒀다. 크게 실망했다. 이유를 몰랐지만, 알 것 같기도 했다. 갈등을 모른 척하고 너무 순순히 물러나는 내게 실망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별거 아닌 만남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건지도 모른다. 그저 그 정도 사이였던 건데 나 혼자 오해한 거로 생각했다. 사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이라고 여겼다.


ᅠ일찍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흐트러짐 없는 친밀한 기분을 느꼈다. 퇴근하면 늘 혼자였던 내게 그들은 완전한 세계를 선사했다. 풍성한 형들 곁에서 막내 역할을 할 수 있는 모임 자리는 내게 각별한 경험이었다. 난 제대로 된 이유조차 듣지 못하고 절교당했다. 이후로 난 전과 같이 커피집을 전전하며 글을 쓰고 독서하며 혼자 놀았다. 하지만 서류에 빨간 줄이 쳐진 사람처럼 어느 모임에 가든 움츠러들었다. 영화관에 가서 배고프면 혼자 가츠동을 사 먹는 게 더 편했다. 친구 하나 없는 직장에서 전에 없는 고독에 시달렸다. 친밀한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이 다시 혼자가 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걸 느꼈다. 나는 그전까지 혼자 잘 살던 사람이었는데, 다정한 맛을 본 터였다. 실로 다정함은 힘이 세다. 태주 형은 내게 단절의 상처를 남겼고, 순수한 인간관계의 회의감을 안겨줬다.


ᅠ세미나는 곧 점심시간이 될 참이었다. 난 점심을 먹기 전에 빠져나와 어디 카페라도 갈 생각이었다. 안부를 주고받던 태주 형은 줄이 길어지기 전에 뷔페에 먼저 가 있겠다며 자리를 떴다. 우린 마치 내일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난 어색하게 손을 흔들다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호텔 앞 횡단보도에 서서 도시의 소음에 젖어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오래된 음악을 틀었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건물 로비에서 태주 형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태주 형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처럼 밝고 따듯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끝이 났지만, 어찌 됐든 내가 틀림없이 그리워했던 친구였다. 내가 한동안 아무 생각도 못하고 이 글을 적은 걸 보면 정말 속절없이 그리해했던 것 같다. 그때의 형도 어렸고, 나는 더 어렸으니까. 생활이 궁핍하고 머리는 텅 비어 있었어도 마음이 넉넉하던 시절의 인연이었다. 난 문득 오늘 밤도 태주 형이 어쩌면 성대 형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등산용 스틱이 달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ᅠ벌써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가죽 손가방을 흔들거리며 몇 번의 건널목을 지나 구립도서관에 도착했다. 로비 근처에서 올해의 도서와 사서 추천 도서를 붙여놓은 게시판을 한참 구경하다가 정기간행물실에 들어가서 영화잡지 '씨네21'을 읽었다. 그 옆에는 '사람과산', '월간산', '마운틴'과 같은 산악잡지가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고봉을 오르내리는 산악인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내가 이 세계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문화를 탐험하는 걸 내 업이라고 여겼는데, 아직도 내가 다다르지 못한 봉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니 막막해졌다. 배가 출출해서 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라면과 김밥을 시키고 챙겨 온 닭가슴살 팩을 곁들였다. 자판기에서 우유를 뽑고 열람실에 들어가서 산악 잡지를 마저 다 읽었다. 의외로 문학적인 글이 많아서 놀랐다. 최근 몇 명의 베테랑 산악인이 악조건 속에 등반하다가 사고로 명을 달리했고, 여전히 내가 모르는 곳에서는 히말라야 고봉을 정복하기 위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외투를 벗고 셔츠 단추를 끌러도 실내가 너무 더워서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이제 봄이 오는 모양이다. 외투를 손에 걸치고 도서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몇 정거장 지나니 한강을 넘어서 당산역에 다다랐다. 문득 성대 형이 그날 집을 방문했을 때 내게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형은 돈을 내고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특유의 말솜씨로 사람들을 네팔 어느 고봉으로 몰아갔다. '언젠가부터 알게 모르게 세계 최고봉 올라갔다는 기사가 줄줄이 쏟아졌잖아. 그게 다 세계적인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에 올라갈 사람을 돈을 받고 모집해서 올려준 거라고 하더라고. 그렇다고 그게 쉬운 건 아니야. 도전하다가 죽기도 많이 죽었어. 근데 그래도 경험 있는 사람과 가는 건 확실히 메리트가 있지. 배우는 것도 많을 거고. 너희들 제일 높이 올라가 본 산이 어디냐? 설악산? 8천 미터가 말이야. 말이 쉽지 이게 정말 죽음의 지대거든. 거의 애들 수준으로 판단력이 떨어져. 몸도 못 가누고 어떨 때는 뇌에 문제가 생겨서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더군. 술 먹고 꼴았을 때처럼 필름이 끊기고 미쳐서 길길이 날뛰기도 한대. 산소가 부족하면 사람이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질 순 없겠지.' 난 형의 말을 듣다가 조금 무서워졌는데, 하도 실감 나게 얘기해서도 그랬지만 날 위축시킨 건 그다음 말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정상에 올려준대. 체력과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나도 갈 거야. 그래서 운동하는 거야. 그래도 돈도 모으는 거고. 꼭 올라갈 거야. 목표는 하나밖에 없어. 거기 다녀오면 프로등산인이라고 다 인정해 줄 거야. 이제 지리산 한라산 지긋지긋해.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이야. 그 위에는 엄청난 폭풍이 있고 혹독한 추위가 괴롭힐 거야. 그걸 견디려면 지금 하는 운동은 아무것도 아냐. 돈은 거의 다 모았어. 몸만 잘 만들어서 내후년쯤 도전해야지.' 맥주캔을 구기면서 그 말을 하는 형을 바라보는 그의 애인은 티가 나게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표정도 가관이었다. 그건 동경하는 마음과 함께 피어난 의문스러운 질문 때문이었다. 대체 거길 올라가서 뭘 하겠다고 그러는 거지. 나는 살짝 도발적으로 물었다. '거긴 가서 뭐 해요. 목숨이 위태로울 걸 알면서도 그 큰돈을 쓰고 거기 올라가서 궁극적으로 뭘 하려는 건데요.' 형은 나를 살짝 노려보다가 내가 뭘 모른다는 듯이 통박을 주듯 답했다. '그럼 너는 왜 그런 글을 쓰는데. 써서 뭐 하는데.' '그야 뭐. 그냥 쓰는 거죠.' 형은 박장대소를 하더니 표정을 바꾸고 여자친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그냥 하는 거지 무슨 이유를 따져.' 평소 둘이 어떤 얘기로 싸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버스가 당산역을 지나 신길역에 다다랐다. 난 버스 벨을 누르고 일어섰다. 성대 형이 과연 네팔의 그 산악지대에 갔을지 궁금했다. 카카오톡 프로필을 열어보니 성대 형이 직접 찍은 산 이미지만 가득했다. 창밖으로 노을 지는 풍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마치 고추장을 풀은 돼지고기찌개처럼 보였다. 오후 6시. '아, 이제 헬스장 갈 시간이네.' 이유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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