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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06. 2023

글을 다 다듬고

 삶은 이런저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일,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다. 요즘 정신이 없다. 메모장이 뭘 해야 한다는 말로 가득 찼다.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라도 된 듯, 분주히 일과를 소화한다. 내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 가까스로 일어나서 홈페이지를 만지고, 모임에서 얘기 나눌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도 할 일 목록에 넣어둔 일들이 나 좀 보라며 아우성을 친다. 독서 모임 시장에 뛰어들면서 수입과 지출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난 종이 냅킨과 포스트잇 심지어 읽던 책 귀퉁이 가라지 않고 집 안 여기저기에서 분주함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저녁 무렵이면 휴지통으로 들어갈 다짐들이 제멋대로 휘갈겨져 있다.


하지만 쉴 틈 없는 와중에도 커피를 위한 시간은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생각한다. 커피 한 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오늘 점심은 오피스텔 앞 세븐일레븐에서 산 2+1 햇반과 1+1 슬라이스 닭가슴살이 다였다. 햇반이나 닭가슴살이 뻑뻑하긴 매한가지라 자꾸 목이 메서 정수기로 받은 뜨듯한 물로 목 넘김을 했다. 빨리 대충 때우고 커피 마실 생각뿐이었다. 커피는 그렇게 의식처럼 내 일상에 틈을 벌려냈다. 구수한 향이 내 시선을 맥북에서 여름 볕에 자라나는 풀잎으로 옮겨냈다. 커피는 유용한 것으로 이뤄진 내 삶 속 무용한 기쁨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커피와 글이 내겐 쉼이었다. 하지만 지난한 새 책 퇴고 과정을 거치면서 글은 쉼과 멀어졌다.


 편집자의 신랄한 평가를 들으면서 부담감은 커졌고, 내 한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백스페이스를 연타하며 한숨을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 막막함에 누구든 붙잡고 짜증을 내고 싶어진다. 그럴싸한 착상도 막상 글로 풀면 볼품없이 흩어지고 만다. 삶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데 반해 글은 더디고 미진해서 힘에 부친다. 하루는 눈 깜빡할 새 흘러가지만, 내 글은 수 없는 마침표를 찍고서도 깜깜무소식이다. 벌건 눈으로 커피를 들이켜며 조잡한 초고를 만져봐도 패배감만 베어진다. 인식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작가 흉내라도 내보려 아등바등하는 꼴이다. 그래서 소설가 커트 보니것이 이런 말을 남겼나 보다. “나는 글을 쓸 때, 입에 크레용 하나를 물었을 뿐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처럼 느낀다.”


예전에는 사지가 절단되어 나뒹굴 때 서점으로 향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일급 작가가 쓴 문장에 밑줄을 치며 안식을 찾았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쓸 수 있기를 소망하며 힘을 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시샘과 함께, 그 격차에 절망감이 든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게 싫어진 건 아니다. 그냥 글이 무서워진 느낌이다. 이제 마음껏 휘갈길 순 없다. 팔리는 글이 돼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고, 내 재능을 의심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복잡하면 도망치는 성격을 가진 나로서는 일종의 고비를 만난 셈이다.


 2주에 한 번 만나서 다정한 사람들과 글로 대화를 나누는 '마음씀' 모임은 한껏 굳은 내 뒤통수와 승모근을 느슨하게 풀어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커피에 글쓰기가 다시 따라붙는 여유가 찾아오길 소망한다. 어쩌면 글쓰기는 책만 내지 않으면 가장 즐거운 일일지도. 그래서 다음 책은 뭘 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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