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민진입니다. 그동안 잘들 지내셨습니까? 그간 십 년 넘게 수백 개의 글을 썼으면서도 이렇게 독자님께 안부를 묻긴 처음이네요. 저는 항상 글을 혼자 쓰고 혼자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와서 읽었다고 댓글과 좋아요를 표해주는 분들을 보며 놀라곤 합니다. 제 글이 혼자만의 투정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며 브런치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메인 화면에 무수히 새로 올라오는 글을 보면 조바심도 납니다. 어느 도시의 조용한 방에서 제 글을 클릭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이상한 설렘이 있거든요. 브런치 대상 이후 독서모임을 크게 열었고, 업로드가 뜸해지면서 구독자는 점점 더 내려가고 있습니다. 전 글과 명백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저를 계속 찔러옵니다.
오늘은 어떤 글을 쓸까 하다가 '결혼'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제가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 '씀'에서 정호 님이 내어주신 주제가 결혼이거든요. 어려운 주제죠. 결혼 관련 글은 하도 많이 써서 저로서도 더는 쓸 얘기가 없어요. 왜 그토록 결혼도 하지 않을 거면서 결혼에 관한 글을 썼을까요. 음... 이유는 있더군요. 일단 결혼하면 이야기가 재밌어지기 때문에 자꾸 손이 갑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영원히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은 달콤하죠. 그러니 이만교 작가도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이야기를 쓰셨을 테고요. 그 환상 속에는 당의정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99퍼센트 다크 초콜릿처럼 퉤 하고 뱉어내게 하는 텁텁함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결혼이라는 주제를 쓰면서 좋았던 건 낭만 때문입니다.
제게 낭만은 우연이라는 것, 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운명의 장난과 같은 얘기입니다. 섬광처럼 빛나는 찰나에 그 사람이 다가와서 영원을 기약할 때 운명을 믿게 됩니다. 저 역시도 정말 말도안 되는 우연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된다거나 아니면 과거의 누군가와 조우한다거나 또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확률로 벌어진 일에 짐짓 놀라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결혼에 관한 상상을 글로 적었어요. 오늘 이야기도 그런 놀라운 경험에 기초한 에피소드입니다.
언젠가 제게 전화가 잘못 걸려왔습니다.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느지막한 오후, 당산의 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책상 앞에 않아 글을 좀 써보려고 애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제가 막 대학원을 졸업하고 복직해서 일 배우기에 여념이 없던 2018년 가을에 벌어진 일입니다. 모르는 번호였습니다. 혹시 몰라서 받았는데 제가 '여보세요' 하자 전화를 건 여자는 제게 웨딩메르디앙 대표님이 맞냐고 물었어요. 저는 전화를 잘못 거셨다고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죠. 웨딩? 뜬금없네 참. 다시 손목을 좀 풀고 손마디로 우두둑 소리를 내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울에 새 관사를 받아서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신나는 글을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잘못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렸습니다.
이튿날 오후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어요. 수화기를 들자 어제 그 목소리더군요. 그녀는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거기가 웨딩 촬영하는 웨딩메르디앙인가요?" "...." "제가 지난주에 가공한 드레스를 취소하고 싶어서요. 위약금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무슨 말을 보태려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무덤덤하게 대답했습니다. "저 웨딩메르디앙 대표 아니에요. 잘못 거셨어요. 번호 다시 알아보시면 좋겠네요. 끊습니다." 저는 미처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슬프고 기구한 사연이 있게 느껴졌거든요. 왠지 말려들면 위험에 처할 것 같은 처연함이 배어 있었어요. 보이스 피싱 뭐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웨딩 업체 대표이거나 그녀의 드레스를 가공하는 테일러인 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사람이 물어보는 질문을 제가 능청스러운 연기로 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솔직히 말하면 장난을 치지 않은 게 아쉬웠고,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를 놓쳐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물고기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어요. 삶이 너무 무료했거든요. 못된 생각이지만 슬퍼하는 그분에게 제가 일종의 유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피식 웃으면서 농담을 날리면 그분도 아픔을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좀 더 말을 시켜서 사연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결혼식을 하려고 했는지, 왜 모든 걸 취소할 수밖에 없었는지 듣고 싶어 졌습니다. 제대로 차려진 위로 밥상을 드릴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마음을 먹고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를 기다렸지만 세 번째 전화는 끝내 오지 않았어요. 그 후 제 머릿속에서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기 시작했고,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가 전모를 드러냈어요. 저는 어떤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어요. 실패한 결혼, 권태로운 조건 만남. 상향 결혼에 목을 매다가 고꾸라진 통속극. 그렇게 엉뚱한 상상을 하며 잘못 걸려온 전화를 계속 염두에 두고 있던 사흘 째 오후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어요. 그녀의 번호였습니다. 저는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네, 제가 웨딩메르디앙 대표 박민진인데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대표님, 저 그 사람과 헤어졌어요. 그래서 드레스 취소해야 해요. 어떻게 하죠? 저 어떡해요?"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는 더없이 진지하게 애원했어요. 자신은 드레스 비용을 꼭 받아야 한다며 환불을 부탁했죠. 더는 장난을 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근데 제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네 환불 절차를 안내드리겠습니다. 그전에 비용을 취소하는 합당한 이유를 상세하게 알려주시면 가능 여부를 체크해 드릴게요. 왜 갑자기 결혼을 앞두고 다 취소하게 되신 거죠?" 저는 그녀의 속사정을 다 알기를 원했지만 불행히도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불현듯 뭔가를 눈치챈 비련의 신부는 제게 호통을 쳤습니다. "너 어디서 장난질이야! 네가 대표라고? 남의 불행으로 장난치고 싶어?" 저는 불현듯 겁이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뭔가를 얘기하려다가 죄책감이 들어 말없이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에요. 저는 요즘도 가끔 그녀를 떠올립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을까. 그 절박한 목소리는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사과를 하고 끊었어야 했는데.
삶을 살다 보면 이토록 우연 섞인 해프닝이 일어나곤 합니다. 저는 직장생활과 사업을 하며 무수한 이들의 결혼을 지켜봐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퇴근하고 방에 들어가면 그들의 얘기를 글로 쓰곤 했어요. 한 커플에게 닥친 운명과 비현실적인 우연을 글로 적으면서 즐거워했죠. 결혼이라는 환상은 제 글 속에서 무참히 깨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인가. 글이어서 얼마나 안전한가. 저는 타인의 연애와 결혼에 관한 고민을 글로 옮기면서 저의 결혼 이야기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상상의 끝은 그 여자의 울먹이는 목소리처럼 비련에 가까웠습니다. 세상의 희한하고 구미 당기는 얘기에는 반드시 관능이 자리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사그라들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언젠가 주어를 '나'로 해서 이런 서두를 적은 바가 있습니다. "내 얼굴에 감돌던 순진하고 열띤 미소가 아직도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 거울로 보지 않아도 얼굴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체감할 수 있는 미소였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진짜 기적이었다. 나는 내 눈으로 기적을 목격했고 내 몸으로 기적을 체험했다. 어쩌면 나도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일은 오직 책에서만 일어나는 줄 알았다. 나는 결혼과 완전히 먼 인간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것이 우연을 운명으로 해석하는 행위라고 하지만 막상 소설로 쓰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제게도 벌어졌습니다. 신에게 감사할만한 사건이었죠.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과도 끝내 결혼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제게 누군가와 평생 같은 집에서 뭔가를 이루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환상문학과 같은 장르였죠. 장르 소설의 특징은 사건의 여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만남과 연애의 시작 그리고 절정에 다다르고 그 이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요. 그런데 결혼은 절정 이후에 다가오는 것들이 핵심이잖아요. 영화 졸업에서 신부를 낚아 채 버스에 오른 더스틴 호프먼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무수히 쌓여가는 일상을 함께할 누군가가 다가올지도 모르지. 근데 이 사람이 그 사람 맞아? 알 수 없는 일이고 늘 아리송하죠.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글로 결혼을 합니다. 글로 권태를 논하고 지근거리에서 결론짓고는 다시 혼자인 방으로 돌아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