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가 사라진 시대에 서정성을 적는
작가 미야모토 테루는 일본 고베 출신 작가다. 1947년생으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지 못했던 그는 건강 문제로 퇴사한다. 이후 소설가가 되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우연히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서점에 들렀다가 요즘 잘 팔리는 소설을 읽으며, 이 정도면 내가 더 잘 쓰겠다, 생각한다. 이는 호언에 그치지 않고 막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흙탕물 강>은 다자이 오사무 상을 받으며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고루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 <반딧불 강>으로 ‘아쿠타가와상’까지 거머쥐며 미야모토 테루는 데뷔 2년 만에 일본 서정 문학 계보를 이어나갈 작가로 급부상한다. 이번 글은 미야모토 테루의 대표작을 살펴보며 그의 문학세계를 탐구한다.
환상의 빛(2010)
단편집 <환상의 빛>은 네 편의 소설로 이뤄져 있다. 그중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도 한 표제작 <환상의 빛>이 단연 돋보인다. 이야기는 유미코의 남편 이쿠오의 자살로 막을 연다. 목격자에 따르면 이쿠오는 이른 아침부터 선로를 걸었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유미코를 컴컴한 어둠에 가둔다. 전조 없는 이별이 남긴 상흔이 유미코를 옭아맨다. 지칠 대로 지쳐서도 그가 죽음을 택했던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두 사람은 유년기부터 친구 사이였다. 둘 다 가난한 형편 탓에 학교를 일찍이 그만뒀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 모두 조용하고 다정했으며, 나이가 들어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기까지 다툼 한번 없었다. 이제는 행복을 입에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 즈음 그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미코는 지인의 소개로 재혼을 한다. 나이 많은 새 남편을 맞아 연고도 없는 작은 시골 마을로 떠난다. 조용한 바다 마을 낯선 창가에 앉아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유미코는 자신이 아직도 이쿠오를 떨쳐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환상의 빛>은 죽음이 남긴 부재를 응시하는 소설이다. 유미코가 죽은 남편에게 쓰는 편지로 이뤄진 다. 화자는 해석할 수 없는 망자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진실이라도 길어 올리려 한다. 미야모토 테루는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저 어떤 일은 일어나고야 말고, 남겨진 자는 하염없이 그 여파를 체감한다. 문학은 어쩔 수 없이 먼발치에서 눈동자가 희미해진 그를 위해 존재한다.
금수(2016)
장편소설 <금수>는 한때 부부였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헤어진 두 사람의 이야기다. 이혼한 지 10년이 된 즈음 아키는 아들과 여행을 하다 케이블카 안에서 전남편 아리마와 재회한다. 둘은 당황해서 몇 마디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다. 심란한 마음으로 가을을 걷던 아키는 아리마에게 아직 미련이 남았음을 깨닫는다. 뭉친 가슴이 풀리지 않아 밤새 뒤척이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두 사람의 인생이 훼손되었던 십 년 전 그 날을 다시 상기한다.
두 사람이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던 늦가을 어느 날, 아키는 경찰의 전화를 받는다. 남편 아리마가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있다는 청천벽력 한 말을 듣는다. 충격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남편이 심하게 칼에 찔려 발견된 곳은 교외 변두리 여관이었으며, 그의 옆에는 호스티스가 동반 자살을 기도해 숨져 있었다. 이후 남편은 어렵사리 회복했지만 두 사람은 급히 이혼을 택한다.
아키의 편지로 시작한 소설은 모두 14통의 긴 회고로 이뤄진다. 현실이라면 포털 뉴스엔 고작 단신으로 실릴 그렇고 그런 사건일지도 모른다. 남녀의 치정에 의한 불륜과 이혼은 흔해빠진 레퍼토리니까. 하지만 미야모토 테루가 펼쳐놓은 속사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소설을 읽다 보면 한 연인이 이별을 택하기까지 이처럼 복잡한 상념을 거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어쭙잖은 진실이란 실은 다면체의 한쪽만 보고 떠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서툰 만남과 손쉬운 이별이 산재하는 요즘 소설 <금수>는 스마트폰 시대엔 어울리지 않는, 오직 편지만이 가질 수 있는 곡진한 감수성을 건드린다.
책 제목 '금수(錦繡)'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수를 놓은 직물이나 아름다운 시문을 뜻하기도 하고 단풍이나 꽃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단풍이 만발한 날에 재회한 남녀는 아름다운 시문을 나눌 순 없다. 다시 시작하기엔 늦었고, 기억은 엄연히 참혹하다. 어차피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허탈감이 엄습한다. 두 남녀는 그저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며 체념에 가까운 회한에 젖는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서로의 사정을 좋은 날씨를 핑계 삼아 보듬는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1998)
<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우연히 한 아파트에 모여 살게 된 네 남녀의 이야기다. 사회인으로 독립해 보려는 조명 디자이너 요시, 네팔에 가서 나비 희귀종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당나귀, 신경증에 시달리면서도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인 직장인 아이코, 사랑꾼이지만 관계에 서툴러 늘 상처만 받는 요코까지. 이들은 서로 사귀고, 헤어지며 토라졌다 다시 술 한잔하며 털어버리는 낙천적인 젊음을 꾸려간다.
소설은 봄에서 시작해 겨울을 거쳐 다시 서투른 봄을 맞는다. 그 과정에서 젊음의 치기는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한다. 고민 없는 섹스와 망설임 없이 꿈을 입에 올리는 나이는 지나가고, 현실에 켜켜이 쌓인 문제들을 마주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침한 <환상의 빛>, <금수>와는 결이 다르지만, 미야모토 테루 특유의 회한 어린 감정이 작품의 말미를 아련하게 수놓는다.
우리가 젊음으로 들떠 모른 척했던 감각은 계절의 순환처럼 어김없이 재회한다. 봄날의 기억은 잠시뿐이고 우울한 장마가 눅눅한 공기를 의식할 즈음 살을 에는 추위가 남 일 같지 않게 찾아온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한 곳에 오래 있으면서도 권태를 느끼지 않는 것은, 날이 새고 저물어도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작가의 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