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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5. 2017

권여선

고독한 이의 술잔을 가득 채워주는 사람

 어제 술을 늦게까지 먹고 늦잠을 잤다. 친구들을 보내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잠잠해졌지만 난 꽤 긴 시간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라는 책을 읽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을 달궜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초등학교 때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일요일 오후 집에서 혼자 잠든 후 깨 보면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적막한 거실에 누워있다. 집이 어두컴컴한 데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커튼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게 보였고 금세 어스름한 기운이 스며든다. 난 좀처럼 소파에서 몸을 떼지 못하고 두려움에 시달린다. 죽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죽는 게 이런 적막이라면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왜들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달까. 술자리가 끝나면 비슷한 기분에 시달린다. 막상 안주를 먹으며 술잔을 부딪칠 땐 되게 즐거운데 다음 날 아침이면 낯선 곳에 버려진 기분이다. 늘 보던 집이 낯설고 차가운 거실 바닥이 빙판처럼 차갑다. 숙취를 안고 혼자 눈뜨는 게 싫어서 술만 먹으면 어떻게 해보려고 수작을 거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말라고 그냥 여기서 같이 있자며 내가 재밌게 해 주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다. 대리비 줄 생각도 없으면서.


 샤워를 한 후 숙취에 다시 침대에 누워 책을 폈다. 독일의 잘 나가는 기자인 ‘마리엘라 자르토리우 스'는 싱글로 삶을 영위하면서 왜 혼자여서 괜찮은지 설득하는 글을 썼다. 저자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의 참담함과 더불어 이를 고독으로 바꾸기 위한 갖가지 노력들을 보여준다. 그 방식이 일종의 자기 최면의 희망고문이 아닌, 여러 학자들과 시대의 유머들을 총동원한 수사라는 점이 근사하다. 가령 철학자 파스칼이 남긴 “오늘날 모든 불행의 근원은 한 가지다. 인간이 홀로 조용히 방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라는 글귀는 고독의 위로를 말하기에 꽤 적절한 인용이다. 그래 인생은 일요일 아침의 고독이지. 모두가 일요일을 두려워하는 건 곧 다가올 출근의 압박이 아니라, 바로 지난 주말을 달궜던 왁자지껄한 소음이 사라져서다. 이제 혼자가 되어 더는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없다는 실망감이다. 


 난 넋을 놓고 벽지만 바라보다 하늘이 컴컴해지기 시작할 즈음 몸을 일으켰다. 우선 커피로 속을 좀 달래야지. 근데 또 원두를 갈아서 내릴 걸 생각하니 귀찮다. 부엌 개수대엔 그릇이란 그릇은 모조리 다 쏟아져 있고, 며칠 전 공들여 닦았던 가스레인지도 마치 용암이 분출한 흔적처럼 재가 가득하다. 폼 잡지 말고 그냥 필립스 커피머신인 살 걸 그랬어. 차 타고 스타벅스 다녀올까 생각하니 얼어 죽겠다. 이럴 때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인스턴트커피도 다 떨어졌다. 김연아의 화이트골드 어딨어! 젠장.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처음에 아이는 한계도 모르고, 포기도 모르고, 목표도 없이, 그토록 생각 없이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돌연 교실이라는 경계와 감금과 공포에 맞닥트리고 유혹과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상상의 전기>라는 이 시를 좋아하는 건 집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교실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내 맘과 비슷해서다. 난 생각 없이 즐겼던 유년에서 벗어나 이제 학생이 되어 혼자 교실 문을 밀고 들어간다. 맞벌이하던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 간 걸 마치 어떤 책임에서 놓여난 듯 좋아했다. 시퍼런 얼굴을 한 애들이 나를 경계한다. 이제 어른이 되기 위해 혼자 살아남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미덥지 않은 어른 아래서 세상의 법칙을 배운다. 의심스럽고 어쩐지 뒤가 구린 그런 잔소리들.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끝내 나만 혼자 남겨두고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건 어쩌면 두려운 일이지만 그토록 바라던 일이라 싫은 티를 낼 수 없다. 이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원해온 터다. 난 이 시에서 아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교실이라는 공간이 내가 사는 집과 같다고 느낀다. 텅 빈 이곳은 그토록 선망한 자립의 공간이지만 사실 오늘도 내일도 크게 달라질 게 없는 닫힌 공간이기도 하다. 크게 달라질 게 없는 미래의 폐쇄 구조. 월요일의 출근을 위한 임시 가림막 정도에 불과한 거처. 그래 커피를 마시고 제정신을 차려야겠어.


 탁자에 어제 먹은 술병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극심한 피로가 엄습한다. 좀 치우고 가지. 난파선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는데 망망대해에 놓인 기분이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하냐. 그냥 다 집어치우고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폈다. 다음 달에 이 책으로 독서 모임을 진행하기로 했다. 난 소설을 여간해서는 두 번 읽지 않는데 몇 년 전에 지인의 추천으로 산 <안녕 주정뱅이>를 워낙 재밌게 읽었다. 그이가 내게 이 책을 재밌다고 떠벌린 곳이 종로의 한 술집이다. 그는 주위를 쓱 둘러보며 술집을 가득 채운 취객들의 사연이 궁금하지 않냐며. 권여선의 소설엔 고약한 술 냄새가 난다고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다음 날 교보문고에서 이 책을 사서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도 모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위에 인생 책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역시 다시 읽어도 기억에 남은 것보다 기억하지 못했던 게 더 많다. 지끈거리는 숙취 같은 책이다. 아스라한 기억은 있지만 불확실한 그런 자취에 불과한 먼지 덩어리. 이 책을 처음 읽던 때 나와 지금의 내가 묘하게 달라졌다면 최근 몇 년간 술과 더 가까워졌다는 거다. 수많은 술자리에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노닥거렸다. 그리고 내가 술자리를 떠나기 싫어하는 부류라는 걸 깨달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도 둔근 힘을 주고 끝까지 버텨내는 타입. 내가 권여선 작가와 닮은 구석이 있다면 그게 아닐까. 절대 집에 먼저 가자고 하지 않는다는 거.


 소설 속 인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술판을 벌인다. 인간이 가장 통념에 휘둘리기 쉬운 곳이 술자리 아닐까. 비틀린 웃음과 난무하는 와중에 기적처럼 진심이 비어져 나온다. 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속에 없는 악담을 퍼붓기도 한다. 한 잔 두 잔 비워지는 술잔을 뒤로하고, 주워 담지 못할 말이 오간다. 두서없지만 잘 들어보면 되게 재밌는 얘기다. 의식했으나 무심코 지나친 감정들. 그건 말로 하면 남사스러워 모른 척했던 민망한 것투성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위선적인 면모 있지 않나. 내가 잘하는 게 알면서 모른 척하고 모르면서 괜히 아는 척하는 짓이다. 마음에 있는데 없는 척하고, 안될 줄 알면서도 수작을 건다. 삑사리처럼 나오는 말실수. 실수로 위장한 본심. <안녕 주정뱅이> 속 인물은 숙취와 함께 아리송한 말을 보태며 주저앉기 좋은 밑바닥을 찾아낸다. 술에 망각이라는 효능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래도 술자리를 찾아 나서는 건 어쨌건 인간사에서 가장 재밌는 건 술과 밤이 만들지 않나. 고쳐 말하면 술을 마신 사람들과 새벽까지 이어진 대화에서 나온다. 듣지 못할 속내가 터져 나오기 때문에 난 어느새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옆 테이블에 대충 걸친 후에 본격적으로 그 자리에 껴서 턱을 괸다. 제발 나 좀 끼워달라는 눈빛으로 말을 보탠다. 내가 술은 잘 못 하지만 썰을 잘 푼다고. 누구보다 잘 듣고 손뼉을 치며 화답할 수 있다고. 때론 술에 취한 듯 너절한 얘기도 심심치 않게 할 줄 안다고. 안주빨은 좀 세우긴 하지만 그렇다고 술도 어느 정도는 마시니까 실망시키지 않을게. 대낮에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소설을 읽다 보니 어제 마신 술기운이 도로 올라온다. 참다못해 속을 해장하려고 어제 먹다 남은 찌개에 물을 붓고 퍼먹었다.


 술은 인간을 귀엽게 한다. 술을 한잔 걸치고 상대방을 응시할 때 오가는 눈빛은 늘 설렌다. 새하얀 눈이 쌓인 거리를 걸어갈 때 남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라든지. 술이 다 떨어져서 같이 사러 갈 때 느껴지는 한기라던지. 손이 시려 냉동만두가 들은 비닐봉지를 고쳐 잡는 순간이 떠오른다. 권여선의 소설들은 고통과 통증을 수반하지만 그렇게 코너에 몰린 인간에게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유머를 던지고, 몸이 아파도 술을 마시며 잊어버리는 이들이 주정뱅이라는 말처럼 귀엽다. 권여선이라는 사람의 문학적 형태가 일종의 후회, 회한, 치기, 원망 등 술이 아니면 버티기 힘든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결국엔 그것이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써 술이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 나름대로 외로움을 견뎌내려고 에탄올에 화약 약품을 잔뜩 넣은 독주를 마시고 사는 거다.


 소설 뒤에 실린 신형철 평론가의 곡진한 해설이 참 좋다. 그의 평론은 내가 느끼기엔 소설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그는 어떤 글을 쓰더라도 물러섬 없이 치열하게 쓴다. 자신이 주역이 될 수 없는 글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신뢰할 수 있다. 소싯적 박지성이 경기장 후방에서 호날두와 루니를 위해 몸을 불살랐던 광경이 떠올랐다. 상대가 거칠게 와도 몸을 부딪치며 볼을 따내고 전방에 공을 뿌려주던 박지성은 신형철과 가장 먼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경기에 임한다는 점에서 같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를 읽을 때마다 애정이 샘솟는다. 가끔은 문학이 위로될 때가 있는데, 그건 소설이라는 세계에 완전히 몰입한 사람을 만날 때에 실감할 수 있다. 신형철은 인물의 고통에 이입하고 그 고통을 정확하게 말해주기에 내가 소설을 통해 느낀 감정이 진짜로 느껴지게끔 해준다. 얼마나 그들을 사랑했기에 그렇게 고스란히 그 사랑을 표현했을까. 난 오래전부터 그의 글을 읽었고,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았고, 볼수록 좀 더 지켜보고 싶은 조바심을 느낀다.


 어떤 불행은 인간이 처리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어 교착상태에 머물고 보통 그럴 때 비틀거린다. 아버지는 과거에 소주 한 병이 없으면 잠을 못 이뤘다. 그걸 다 들이키고 퀭한 상태가 되어야만 이불을 걷고 들어갔다. 실패로 얼룩졌고 그걸 믿을 수 없었기에 혼자서 망각의 묘약을 마셨다. 난 그걸 보는 게 너무 짜증 나고 싫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그가 한심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자신이 겪는 불행이 마치 혼자의 것처럼 굴었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의 소산에 불과함에도 대책 없이 무너졌다. 그걸 몇 년이나 지켜보고 난 지금으로선 아버지에게 술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술이 현실을 흩트리어놨고 엄연한 중력을 교란시켜 까치발을 들고 방바닥에 나뒹굴 수 있었다. 술은 그가 자그맣게나마 위엄을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래서 난 주정뱅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에 취해 몸이 기우는 이를 보면 이상하게 안쓰럽다. 등을 쓰다듬으며 한 잔 더 하라고 술잔을 채워주고 싶다. 이거 마시고 다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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