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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5. 2016

김애란

누군가의 불행을 상상하는 작가

 문단의 '앙팡 테리블'이라 불리며 등단 초기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작가 김애란도 이제 서른을 지나 마흔의 문턱에 다다랐다. 그 이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됨은 물론, 작품세계도 나름의 변화를 거듭해왔다. 활동 초기에는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받아넘기던 날렵한 손길이 돋보였다면, 최근에 이르러서는 점점 더 어찌할 바 모르는 무력한 기운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혹자는 이런 변화를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체념 어린 시선으로 느낄 테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작가가 다루는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면서 갖게 된 조심성으로 해석한다. 김애란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슬픔을 다루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모를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바깥에 서서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고 써낼 수밖에 없는 무거운 심정이 고스란히 소설 속에 녹아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세상 어떤 일도 손쉽게 해석할 수 없으며, 섣부르게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한 일은 더더욱 드물게 일어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난 독자로서 사안마다 신중한 접근 방식을 취하는 작가의 태도에 깊은 신뢰감을 느끼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그와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그래서 오늘은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한국 문단의 최전선에 선 작가 김애란의 대표작을 소개하기로 한다.


달려라 아비(2005)


김애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조금 이상하다. 작가는 화자에게 가혹한 상황을 쥐여주고는 자꾸만 피식거리게 하는 유머를 탑재한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며 킥킥거리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지금이 웃을 때냐고 자책하게 된다. 삶에 못지않은 농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쉽게 낙관할 수 없다. 웃음을 그치면 적막은 더 집요해지게 마련이다. <달려라 아비>는 대도시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을 날 선 어조로 비추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별로 나아질 것이 없는 막막한 서울 생활의 적요한 비관이 그득 차 있다. 거기에 유머는 그 비관을 냉소로 바꾸는 양념과 같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 가장 혹독한 작품은 <나는 편의점에 간다>이다. 화자인 20대 여성은 동네 여러 편의점을 다니며 느끼는 생각을 풀어놓는다. 인구 밀집도 최고를 자랑하는 신림동은 골목마다 편의점이 있고, 24시간 쉬지도 않고 없는 거 빼곤 다 제공한다. 우린 그곳에 대해서라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종업원의 영혼 없는 인사, 간단하게 때울 수 있는 컵라면, 음악을 귀에 꽂고도 구매행위를 할 수 있는 편의성, 말없이 돌아가는 CCTV, 물 한 잔 얻어 마시려면 기본 700원이 드는 그런 장소. 대도시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상징이 된 공간이다. 화자는 거의 매일 편의점을 드나들면서도 막상 급할 때 열쇠 하나 맡길 곳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 순간 화자는 우주와 완전히 분리된 타인으로 버려진다. 화자의 존재감은 휴지와 도시락 영수증 정도의 크기만큼 사그라든다. 가까스로 버텨온 20대의 고단한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앞날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음에 절망한다. 먼지 같은 존재감을 피할 길 없으니 이럴 땐 역시 자조적인 유머 하나를 덧붙여야 잠들 수 있다.

 <달려라 아비>의 마지막 수록작인 <노크하지 않는 집>도 어둡기는 매한가지다. 편의점만큼이나 도시 1인 가구에 익숙한 공간이 고시원이다. 신림동의 빽빽한 원룸촌을 연상케 하는 고시원 풍경은 부동산 왕국 서울에서 가장 빈틈없이 빼곡한 공간이다. 서로의 몸이 스치기라도 할까 두려워 눈을 흘깃거리는 그 좁은 복도에는 일 평 남짓한 자기 공간도 확보하지 못한 약자들이 바삐 오간다. 한 달에 20만 원을 내고 함께 살며 서로의 삶을 탐색한다. 한 층에 다섯 명이 공간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서로 말을 나누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서로를 의식하지만, 결코 티를 내지 않는다. 화장실, 빨래건조대, 신발장처럼 삶의 일부분을 명백히 나누면서도, 서로의 흔적을 지워가는 형상은 퍽 인상적이다. 마치 영역 표시를 하듯 서로의 특질을 숨기지 못하는 여자 1과 옆방의 여자 2~5는 어느새 같은 군의 계급으로 묶인다. 사회적 약자, 성공을 갈망하는 초년생, 대상화된 용어로 신문지 사회면에서 자주 다루는 고시원의 삶. 20대 청년실업자, 88만 원 세대의 아르바이트생, 을에서 갑으로 태어나지 못한 약자들처럼 이제는 지긋지긋한 지칭이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면 마치 회사 계단실에서 얘기를 나누는 기분이다. 자판기에서 지독하게 단 밀크커피를 뽑아 들고 몰래 소곤거린다. 웅웅 거리며 울리는 공기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번지르르한 도시 한구석엔 여전히 은밀한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에 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스친 무수한 이가 떠올라 작가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내가 잊으면 더는 꺼내지지 않을 삶이 이 소설집 속에 웅크리고 있다.


두근 두근 내 인생(2011)


 김애란 작가가 2011년에 낸 소설 <두근 두근 내 인생>은 열일곱에 아이를 낳은 어린 부부의 이야기다. 아이는 남보다 빨리 늙는 병을 갖고 채 태어났고, 어린 부부는 아픈 아이의 이름을 아름이도 짓고 어렵사리 삶을 꾸려나간다. 아름이는 어린 부모 밑에서 자라 일찍부터 철이 들었고, 살날이 구만리인 부모는 삶을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어 의도치 않게 아름이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선사했다.

 아름이는 치료에 전념하느라 거의 병실에만 머물며 무수한 책을 읽는다. 그리고 침대에 기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해서 글로 적기를 즐긴다. 불치병에 걸린 아름이가 펜대를 쥔 덕에 독자는 고단한 병세를 지켜보지 않을 수 있다. 그보다는 생의 보폭이 좁은 아이에게 책이라는 통로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 여린 존재가 버텨낼 시간이 가혹하기만 했다면 아마 책장이 더 무거웠을 테지만, 김애란은 영락없이 악화할 병세를 마주하기보다는 남은 삶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지 어린 부부와  함께 둘러앉아 얘기할 수 있도록 이끈다.

 아름이는 지나치게 위악적으로 굴지도, 그렇다고 대책 없이 순수한 말을 뱉지도 않는다. 작가로서 자의식을 지닌 아름이는 공들여 쓴 문장에 스스로 감당해야 할 고유한 불행을 뽐낸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흔한 비극이 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고가 <두근 두근 내 인생>을 신파의 터널에서 구해냈다. 내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다르다는 뿌듯한 기분은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같다.

 무엇보다 아름이의 유머 감각이 소설에 숨통을 틘다. 김애란의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즐길 수 있는 가벼운 농담이 아이의 시점에 이물감 없이 포개진다. 애늙은이처럼 옆집 노인과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낯선 타인을 유심히 관찰해서 재치 있는 묘사를 곁들이는 대목은 분주한 도시를 잠시 멈춰 세운다. 그렇게 순간을 하나하나를 챙기다 보면 세상이 잠시나마 그럴듯하게 보인다. 아름은 삶과 적정 거리를 둔 채 느슨한 일상을 글로 푼다. 남겨질 사람의 안부를 살피고, 삶이 돌아가는 꼴에 애정을 표한다. 애늙은이처럼 부모의 슬픔을 독자 대신 살피고, 무참한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꾸민다. 위엄 있는 죽음이란 어떤 걸까. 아마도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사라지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김애란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두 분에게 뭔가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우등상도 학사모도 아닌, ‘이야기’ 여야 할 것 같았다.” 예술은 영속한 주물이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기적처럼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아름은 창작을 통해 스러져가는 목숨에 풍향계를 단다. 무수한 작가들이 세상에 이야기를 남긴 것처럼, 정성스레 단어를 조탁하고 미묘한 문장을 배열해 가혹한 삶을 미화한다. 현실감이 엄습하는 순간을 유예하고, 정서적 감응을 통해 세상을 완충한다.

 작품의 에필로그, 아름인 죽기 전에 부모의 삶을 저만의 방식으로 각색해 자신의 탄생 설화를 완성한다. 내 존재의 자긍심을 위해 단출한 문장에 미사여구를 붙여 꽤 그럴싸한 로그라인을 만든다. <두근 두근 내 인생을>을 얘기할 때 너무 예쁘기만 한 소설은 아니냐는 누군가의 불평도 이해는 간다.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도 그렇다고 온전한 사실도 아니다. 온 감각을 키보드로 두드려 생을 다시 만들 뿐이다. 한 번 뿐이라 다소 아쉬운 촬영분을 날렵한 솜씨로 편집해내는 기술이다. 좋은 글은 무기력한 모방을 버리고 표현을 주장한다. 세계의 정밀한 묘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접하며 획득한 감각을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김애란은 한 아이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을 최대한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와 격렬하게 다퉜을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들었던 미심쩍은 마음도 어느새 사그라든다.


비행운(2012)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은 서울 언저리에 사는 다양한 인물이 화자로 등장한다. 남몰래 좋아했던 선배의 부탁에 레슬링복을 입고 푸드파이터와 대결하게 되는 백수(‘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조금씩 그럴듯해 보이는 삶을 살고는 있지만 실은 세상에서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끼는 직장인(‘큐티클’). 세상의 종말과 같은 순간에 홀로 살아남아 골리앗 트레인 위에서 버티는 소년(‘물속 골리앗’), 조선족 아내를 잃고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울을 배회하는 택시 운전기사(‘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교도소에 있는 아들에게 사식을 넣어주려고 추석에도 추가 근무를 하기로 한 인천공항의 청소부(‘하루의 축’)가 있다. 남자 친구의 배신으로 다단계 판매 조직에 발을 들이고, 결국엔 자신을 따르는 학원 제자마저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여자(‘서른’), 헤어진 남자 친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만나 불행했냐고 물어보는 여자(‘호텔 니약 따’)는 한치의 빛도 허용치 않는 어두운 심연을 훑는다.

 <비행운> 속 사람들은 어중간한 위치에서 움직이는 물고기 같다. 평범해 보이지만 막상 자세히 보다 보면 그 움직임과 생김새가 기이하고 독특하다. 우리 동네 다세대 주택에서 벌어질 만한 이야기라서 눈이 가지만, 막상 읽다 보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서 무심해지는 심적 거리감이 있다. 내가 유독 마음에 품은 작품은 그중에서도 기옥 씨의 사연 <하루의 축>이다. 기옥 씨는 세계 최고의 공항이라 불리는 인천 국제공항에서 근무한다. 화장실 청소 용역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많은 사람이 배설하고 가는 그곳을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만든다. “기옥 씨는 항상 세면대와 변기, 바닥과 거울 위를 ‘이제 막 닦아낸 것처럼’ 만들어놔야 했다. 인파가 쉴 새 없이 오가는 공간에서 바로 그 ‘드나듦의 흔적’을 없애는 것. 이것이 공항 청소의 핵심이었다.” 그 자신도 마치 공항의 승강기와 의자들처럼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 편의를 위해 희생하는 삶, 아들 영웅이의 호주 어학연수를 꿈꾸며 창밖을 바라보는 하루하루다.

 하늘 위로 보이는 비행운은 그런 기옥 씨의 막연한 희망과 같다. 일과를 견디는 삶이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이유. 아무 일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청결한 화장실 안에는 오만불손한 인간들의 흔적이 그녀의 손에 의해 씻겨나간다. 뭉개 피어난 구름은 고된 노동을 다 끝냈을 때 기옥 씨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낭만이다. 김애란이 그려낸 도시의 삶은 이처럼 흔한 모욕과 자그마한 낭만이 갈마드는 형상이다. 행운과 비행운의 교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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