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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8. 2019

폴과 공원을 거닐다

소재 <달의 궁전>

 검색창에 소설가 폴 오스터를 넣었다. 그는 평생 뉴요커였지만 도시에서는 벌어질 리 없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쓴다. 모름지기 좋은 소설이란 그럴 리 없어 보이는 사건을 그럴 법하게 쓰는 짓이거늘. 폴 오스터야말로 이에 딱 부합한다. 사진 속에서 비스듬히 앉은 그를 꼼꼼히 살폈다. 선 굵은 눈매와 세련된 옷차림. 오늘은 당신에 대해 적습니다.


 서사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분위기로 휘어잡는 소설이 있다. 깊이 잠겨 빠져나오기 싫은 날씨와 공기, 인물이 걷는 거리가 이야기를 장악한다. 가령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 나에겐 그런 소설이다. 1인칭 화자인 소년이 머무는 집과 녀석의 독서에 친밀함을 가진다. 허름한 집, 방안의 색상, 책의 먼지가 만들어내는 냄새까지 난 점층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가만 보니 녀석은 지금 곤란한 상황이다.


 책더미 곁에서 소설을 읽는 소년. 녀석이 책을 넘길 때마다 관자놀이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소년은 책 귀퉁이에 뭔가를 끄적인다.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때는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그해 여름. 포그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촉망받는 23살의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계획이 없다. 포그는 지금 감당하기 힘든 실의에 빠져있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아버지는 어릴 적에 떠나고 없다. 포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외삼촌마저 죽었다. 불행이 동네 강아지처럼 자길 따라다닌다. 포그는 삼촌이 유산으로 남긴 셋방에서 조용히 하루를 버틴다. 서가에 꽂힌 1,492권의 책을 읽으며 종적을 감춘다. 침묵은 일요일 정원 풍경처럼 녀석에게 안도를 선물한다. 어둠이 주는 아늑함을 알아버린 이상 더는 커튼을 칠 수 없다. 뉴욕이라는 기계설비는 소년에게 그저 묵시록적 형상에 불과하다.


 난 회사를 빠져나와 여의도의 한 서점으로 향했다. 수많은 책이 서점에 꽂혀있다. 난 폴 오스터의 작품들이 있는 서가 앞에 섰다. 방에 틀어박혀서 떠오르지 않는 문장을 허공에 쏟아내는 그를 상상했다. 몽상을 억지로 백지에 녹이려니 힘이 들지요. 요즘 작품 활동이 뜸하시던데 어떻게 사시나요.


 서점을 몇 바퀴 도니 배가 고프다. 책은 마음에게만 양식을 내어준다. 배고픈 생계를 문학이 대신할 순 없다. 폴 오스터도 무명시절 고물 타자기로 쓴 원고를 빵과 교환하며 버텼다. 긴 어둠은 그에게 검소한 굶주림을 알려줬고, 절박한 일상을 꾸려가는 미덕을 지어냈다. 그는 그래서 요즘도 규칙적으로 쓴다. 매일 아침 오렌지 주스 한잔을 마시면서 신문을 읽는다. 그리곤 집 근처 작업실로 가서 특별한 일 없으면 저녁까지 글을 쓴다. 넥타이를 매고 뿔테 안경을 닦아가며 글을 쓰는 게 영락없는 사무실 노동자다. 폴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모눈종이 공책에 글을 쓴다. 더는 손 볼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고쳐 쓰기를 거듭한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공책에 한 땀 한 땀 새겨 넣는 육체적인 경험을 만끽한다. 그는 늘 내가 퇴근을 할 무렵까지 작업한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어렵사리 문장으로 꾸어내느라 고생했어요.' 내가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새 책은 밤이 되었다.


 늦은 저녁 여의도 근처 카페는 조용하다. 난 포그의 방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창을 매단 대형 커피가게에서 책을 읽는다. 그러다 좀이 쑤시면 여의도 공원을 산책한다. 포그가 삼촌의 셋방에서 쫓겨난 이후 다다른 곳도 공원이다. 물론 녀석이 몸을 뉜 곳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다. 포그는 노숙을 하며 가까스로 버틴다. 폴 오스터도 집필 중에 센트럴 파크를 자주 거닌다고 한다. 거대한 녹지가 조성된 세계적인 공원은 절로 사색을 부른다. 포그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비둘기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주워 먹으며 연명한다. 난 공원 구석 편의점에서 초코바를 사 먹었다. 초코바의 이름은 자유시간이다. 난 무엇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공원을 걷는다. 일상다반사에 비어 나오는 걱정을 덜어내려고 움직인다. 옆으로 꽉 막힌 여의대방로가 보인다. '지긋지긋해 정말.' 포그는 우연히 페티라는 소녀를 만나면서 구원을 받는다. 거대한 괴물이 되기 전에 이쁜 애인을 만나 구조된 셈이다. 달 착륙과 의심스러운 혁명이 횡횡하는 시대, 전복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1960년대, 폴 오스터는 한 소년에게 문학과 공명하는 시간을 안겼다. 난 공원 벤치에서 하품하는 폴 오스터 씨를 그려봤다. 그 옆에서 나도 귀를 후비며 다리를 꼬고 건너편 벤치에 앉은 포그도 그려넣었다. 꽤 쌀쌀해진 날씨에 더는 허기를 참지 못하고 달의 궁전이라는 중국집으로 향했다. 굴짬뽕은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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